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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생산주의 농정의 ‘트레드밀’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1/02/01 11:03
    • 조회 794
    생산주의 농정의 ‘트레드밀’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녹색혁명에서 스마트팜까지


    헬스장의 러닝머신이 죄수들의 고문기구인 ‘트레드밀(treadmill)’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헬스장에 가면 가장 많은 운동기구가 러닝머신이다. 트레드밀은 트레드(tread, 밟다)와 밀(mill, 방아)의 합성어이다. 즉 ‘밟는 방아’이다. 이 밟는 방아는 1818년 영국에서 개발된 고문기구인데, 죄수들에게 중노동을 시키면서 동시에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죄수들은 트레드밀에서 원통형의 계단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 서서 하염없이 밟아 올라가면서 중장비 모터 역할을 했다. ‘인간 풍차’라고도 불린 끔찍한 고문기구, 트레드밀은 1898년에 폐쇄됐다.

    미국의 농업경제학자 코크레인은 1958년에 미국농업의 발전과정을 트레드밀 이론으로 설명했다. 소수의 농민이 생산을 늘리고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면 초과이윤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잠시, 다수의 다른 농민들이 이 기술을 채택하게 되면, 생산이 더 늘어나고, 가격이 하락해 초과이윤은 사라진다. 그러면 다시 보다 효율적인 신기술을 도입하지만, 이 효과도 곧 사라지고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헬스장의 러닝머신 위에서 앞으로 가기 위해 열심히 걸어도 제자리에 있는 것과 같다. 트레드밀의 속도에 맞추지 못하는 사람(농민)은 탈락할 수밖에 없다. 대규모의 공격적이고 혁신적인 농민들은 생산규모를 키워가지만 소규모의 덜 효율적이고 덜 공격적인 농민들은 차례로 농업생산에서 쫓겨난다. 코크레인은 이와 같은 농업 기술 변화의 트레드밀 효과를 식인종에 비유하여 ‘동족끼리 잡아먹는 과정’이라고 개탄했다.

    트레드밀 이론, 생산주의 농정으로 가속화

    트레드밀 이론은 경제적으로만 보면 농업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만, 농업 트레드밀은 자연스러운 경제현상만은 아니고 생산주의 농정에 의해 가속화됐다. 국가는 공업화 과정에서 도시의 산업노동자들에게 값싼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농업생산성을 향상하고 생산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농업 연구개발(R&D)로 노동절약적이며 다수확이 가능한 기술을 개발하는 한편, 농민들이 이러한 기술을 채택하도록 자본보조나 투입재보조를 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농업관련산업 기업과 농과학자의 이해와 일치하면서 강화됐다. 영국의 농업경제학자 구드만은 이러한 현상을 국가, 농업관련자본, 농과학자의 ‘공생’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농민들은 생산주의 농정에 의해 두 차례 반강제적으로 농업 트레드밀에 올라탔다. 1970년 정부는 부족한 식량문제와 식량수입에 따른 외화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통일벼’라는 이름의 다수확 신품종을 개발했다. 신품종은 한국인이 먹는 자포니카와 다수확 품종인 인디카를 교배한 것으로 다수확성이 확인되면서, 이른바 녹색혁명의 ‘기적의 쌀’로 불리었다. 정부는 신품종의 보급을 위해 모든 행정력을 동원했다. 벼 수매가격을 인상하고 통일벼를 우선 수매하는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나 많은 농민들이 신품종을 거부했다. 통일벼는 밥맛이 없어 정부 수매 이외에는 팔기 어려웠다. 신품종은 농약과 비료를 많이 투입해야 하고 병충해가 빈발하고, 물과 노동력도 많이 필요했다. 더욱이 볏짚이 짧고 매가리가 없어 가마니나 새끼를 꼴 수 없어 농한기의 유일한 수입원인 볏짚 가공품을 생산할 수 없었다. 독재정부는 신품종 보급을 위해 ‘채찍’을 동원했다.

    이문구 작가는 소설 <우리동네>에서 최씨의 심경을 빌어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요새 벱씨 가지구 시끄런 것 봐. 재래종 심으면 면이나 군에서 오죽 지랄허겄나. 통일베 안 심으면 면장이 직접 모판만 갈아엎는 게 아니라, 벱씨 담근 통에 마세트라나 무슨 약을 쳐놓아 싹두 안 나게 헌다는 겨, 군수가 못자리 짓밟을라구 장화 열다섯 켜리 사놓구 벼른다는 말두 못들어 봤남… 천상 통일베를 심으야 헐텐디.”

    농민들은 ‘당근’과 ‘채찍’에 의해 통일벼 트레드밀에 올라탔다. 그런데 통일벼 트레드밀은 비료와 농약 등 화학적 기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속도가 크게 빠르지 않아, 많은 농민들이 적응했다. 그러나 두 번째 트레드밀은 첫 번째와 차원이 달랐다. 정부는 가트 우루과이 라운드에 대응하여 1989년 4월 ‘농어촌발전종합대책’(농발대책)을 발표했다. 농발대책은 ‘국제경쟁력 있는 농업’만이 살 길이라는 경쟁력 지상주의를 농정이념으로 했다. 즉, 농산물시장개방은 피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농업이 살 길은 농업구조 개선을 통해 국제경쟁력 있는 강한 농업을 육성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영세농은 탈농을 유도하고, 소수의 상층농에게 규모 확대를 위한 지원을 집중한다는 것이다.

    농발대책 발표 이후 ‘문민정부’는 6공 정부가 수립한 ‘농어촌구조개선대책’(이른바 ‘42조원 투융자계획’)의 3년 조기집행을, ‘국민의정부’는 1999년에 45조원의 제2단계 농업・농촌투융자계획을, ‘참여정부’는 2004년에 10년간 119조원을 투입하는 ‘농업・농촌종합대책’을 추진했다. MB정부와 박근혜정부는 이전 정부의 개방에 대응한 수세적인 경쟁력주의를 뛰어넘어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공격적 경쟁력(네덜란드를 모델로 한 수출농업)을 주장했다. 각종 대책은 종합적 성격을 지니지만, 실제로 사용된 재정의 거의 대부분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개선(특히 쌀 농업)에 사용됐다.

    트레드밀이 초래한 경제·사회·환경적 문제

    경쟁력 지상주의를 이념으로 한 생산주의 농정(농업구조정책)은 소수의 대농을 육성하고, 농업생산성을 크게 높였다. 그러나 ‘국제경쟁력 있는 농업’이란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고, 농업과 농촌의 전반적 상황은 악화했다.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 농업투융자계획에 대해 보수언론은 천문학적 재정 운운하면서 농업투자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비난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국민들의 농본주의적 정서는 급속히 붕괴하고 농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초리는 차가워지고 점차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농업과 농촌은 섬과 같은 존재가 됐다. 그 이유는 생산주의 농정의 트레드밀이 초래한 심각한 경제적・사회적・환경적 문제 때문이다.

    첫째, ‘성장과 소득의 괴리’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정환의 연구에 의하면 1990년대 이전에는 총생산과 소득이 같이 증가했으나, 구조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95∼2012년 사이에는 실질 농업총생산은 연평균 1.1% 증가했으나 실질 총농업소득은 연평균 2.6%나 감소했다. 이는 농산물 수입 증가와 생산 증가로 농산물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인데, 그 이면에는 농업 트레드밀이 작용하고 있다.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 투입재와 외부 자본에 대한 의존을 높일 수밖에 없고, 이는 당연히 농업생산물 가운데 농민이 차지하는 몫은 작아진다. 농민은 줄어든 몫을 보충하기 위해 규모를 키우지 않을 수 없고, 그만큼 외부 자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경쟁력주의에 기초한 생산주의 농정은 이러한 ‘죽기 살기 식 경쟁의 트레드밀’의 악순환을 가속화했다. 농기계 및 시설 등 농업투입비용은 급속히 늘어났다. 농업소득률(농업총수입에서 농업경영비를 빼고 농가에 돌아가는 소득의 비율)은 1970년 78.2%에서 녹색혁명이 시작된 이후 1990년에는 69%로 낮아지고 90년대의 구조농정 이후 급격히 하락하여 2019년에는 29.8%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에 100원 어치 농산물을 생산하면 78원이 농민 몫이었는데, 이제는 30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같은 소득을 올리기 위해서는 규모를 2.5배 이상 키워야 한다. 여기에 늘어나는 가계비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농업규모를 무한히 키워가야 한다. 2019년 현재 전체 농가의 1%도 안 되는 경지규모 10ha 이상 농가만이 농업소득으로 가계비를 감당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둘째, ‘농민소득의 상대적 박탈’과 농촌 내 소득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1995~2019년 도시소비자와 농가의 상대소득은 95%에서 62%로 하락했다. 실질 농업소득의 감소로 농가소득이 전반적으로 악화했지만, 생산주의 농정에 힘입어 일부 ‘억대 농부’들이 나타나면서, 농가소득의 불평등과 양극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소득분배의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소득5분위배율(소득상위 20%의 평균소득을 하위 20%의 평균소득으로 나눈 값)은 1995년 6.3에서 2018년에는 11.1로 높아졌다. 이는 전국 평균 5.2의 두 배가 넘는 수준으로 그만큼 도시에 비해 농촌의 양극화가 매우 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농업 트레드밀로 인한 급격한 이농과 고령화로 농촌 공동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농가인구는 1970년 1,442만명(전체 인구의 45.9%)에서 2019년 224만명(4.3%)으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은 4.9%에서 46.6%로 높아졌다. 같은 기간에 농촌인구도 반토막이 나서 1970년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촌에 거주했으나 지금은 18%(면에는 9%)만이 농촌에 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른바 지방소멸이 운위되고, 향후 30년 내 226개 시군구의 39%(89개)가 소멸할 것이라는 불온한 예측이 횡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농업 트레드밀이 얼마나 빨랐는가는 전체 취업자 중 농업취업자 비중이 40%에서 16%로 줄어드는 데 걸린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영국 70년, 미국 95년, 일본 31년에 비해 우리나라는 14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넷째, 농업 트레드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이다. 우리나라는 집약농업과 공장형 축산으로 인한 환경부하가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비료 사용량은 1ha당 질소의 경우 OECD 평균의 3.4배(1위), 인의 경우 8.6배(2위)에 달한다. 또한 농약의 경우에도 주요 선진국의 4~10배에 달하는 엄청난 양을 사용하고 있다. 축산의 경우도 사육밀도가 OECD 평균의 3.1배나 높아 분뇨와 악취로 인한 환경파괴가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비료와 농약, 축산 폐기물은 토양오염을 가져올 뿐 아니라, 하천과 강으로 흘러들고, 결국은 바다로 가 해양오염의 원인이 되고 어족 자원을 고갈한다.

    농업 트레드밀로 인한 토양의 산성화 심지어 콘크리트화는 탄소 흡수 기능을 약화하고, 이산화탄소와 메탄, 질소산화물의 형태로 온실가스를 배출하여 기후변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집약적 농업은 필연적으로 단작을 초래해 생물다양성을 파괴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물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쇠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1만5,000리터의 물이 사용되고, 곡물은 1,500리터, 과일은 1,000리터가 필요하다.

    다섯째, 생산주의 농정은 경쟁력 강화를 표방했으나 국제경쟁력이 오히려 악화했다. 식량자급률은 1990년 70.3%에서 2010년 55.1%, 2018년 46.7%로, 그리고 곡물자급률은 같은 기간에 43.1%, 27.6%, 21.7%로 낮아졌다. 쌀은 간신히 자급을 하고 있으나, 이는 경쟁력이 높아져서가 아니라 쌀 수입제한 조치에 의한 것이다.

    “엘리트 농정, 농업 트레드밀에 의한 살농 정책”

    생산주의 농정의 농업 트레드밀은 이처럼 처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농산물 시장 개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필자는 1989년 농발대책이 발표된 후 모 신문의 칼럼에서 “‘국제경쟁력 지상주의’에 매몰된 엘리트 농정은 농업 트레드밀에 의한 살농(殺農) 정책”이라고 혹평한 바 있다. 불행하게도 필자의 경고는 틀리지 않았다.

    ‘지구의 벗’은 1991년 “트레드밀을 멈춰라(Off the Treadmill)”라고 했다. 농업 트레드밀을 멈춰야 한다. 다만, 트레드밀은 그 자체로서는 일정한 시장경쟁의 합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멈추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부는 농업 트레드밀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오히려 농업 트레드밀의 속도를 최고조로 올리는 ‘스마트팜’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제 농민들은 정부 지원을 받는 스마트 엘리트 농민들과 죽기 살기로 경쟁해야 한다.

    물론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농업의 스마트화, 스마트 기술의 농업부문 응용을 위한 정부의 연구 개발 노력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부가 나서서 수천억원의 예산을 들여 극소수의 엘리트 농민을 양성할 일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포드주의 축적 체제의 산물인 생산주의가 탈성장의 21세기에 한국에서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생산주의 농정의 미몽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희망을 논할 수 있다. 농업 트레드밀을 둘러싼 국가와 농업관련자본, 농과학자의 ‘공생’(삼각연합)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도올 김용옥 선생께서 노자 도덕경을 빌려 소빈(素牝)이란 호를 지어주셨습니다. “소는 소박함, 꾸밈없음이고, 빈은 대지, 뭇 생명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소빈은 조선인의 소복과도 같은 흙을 의미한다.” <가보세>는 “새야 새야”와 함께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널리 불러졌던 참요입니다.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 ‘농어민이 행복하여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위해 더 지체하지 말고 함께 가보자는 염원을 담아봅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기획- 소빈 박진도의 가보세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31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