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은 초대받지 못하는 ‘농정 공론장’ | 서정민 지역재단 지역순환경제센터장
- 작성일2020/02/21 11:04
- 조회 689
약자들은 초대받지 못하는 ‘농정 공론장’
| 서정민 지역재단 지역순환경제센터장
동원된 구성원, 단기적 성과 위해 운영
깜깜이 회의와 정책결정 되풀이
다양한 주체·수평적 의사결정 보장돼야
몇 달 전 A군 농정거버넌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역농민과 공무원, 외부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여하는 농정 거버넌스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첫째, 참여농민 대다수가 연간 농업소득 7천만 원 이상 대농이라는 점, 둘째, 지자체 보조사업의 상당부분이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들은 최근 농업계 화두인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수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대농들은 수도작과 시설원예, 축산 등 농업경영형태에 따라 한 농가가 여러 보조사업을 중복 지원받는 것에 대해, 기 투자된 곳에 집중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농업계의 화두인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수당’에 대해서는 모든 농가에게 균등하게 나눠주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농들의 이러한 주장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농업·농촌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이 공론화 과정을 통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대농과 농민단체 대표 등 소수의 리더 이외에 중소농과 여성농민, 청년,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등 농촌주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공론의 장에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협치기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거버넌스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첫째,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행정에서 지역단체 대표들로 구성원을 결정한다. 행정에 의해 참여가 아닌 동원으로 구성원이 결정되고, 이들의 대표성은 농민과 주민들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행정으로부터 부여된다는 점이다.
둘째, 논쟁과 토론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보다 단기적 성과를 위해 운영된다. 행정은 거버넌스의 운영기간과 안건도 미리 결정해 놓는다.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가 반영되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시혜적 관점에서 지역농민과 주민들을 위한 일부 정책과 사업을 발굴하기도 한다. 지역농민과 주민의 입장에서는 '깜깜이 회의와 정책결정'이 아닐 수 없다.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B면 추진위원회는 중심지 2개 마을 이장과 개발위원장, 부녀회장 등 리더 1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배후마을 등 다른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추진위원장은 “인원이 많아지면 시끄럽고, 시설이 들어가지 않는 배후마을 주민들은 사업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중심지와 기초생활거점사업 등 읍면단위 사업 추진위원회 구성을 소수의 지역리더 몇 명이 결정하는 것이다. 민간 역시 행정의 거버넌스 구성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거버넌스는 효율적인 회의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론의 장이다. 거버넌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적 의사결정방식이 아니라, 정부와 시민사회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수평적 의사결정 방식이다. 거버넌스는 이해를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하고 복합적인 연대와 분열의 반복과정이기도 하다.
소수의 엘리트가 통치하던 20세기는 관리, 통제, 폐쇄 등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21세기는 다양한 주체들의 높은 수준의 참여와 협력, 공유와 개방, 수평적 관계 등 새로운 가치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사업도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시대이다. 정책결정과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명하게 개방되고, 정책을 민관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수평적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제레미 하이먼즈·헨리 팀즈, 뉴파워 : 새로운 권력의 탄생)
최근 읍면단위 주민대표기구인 주민자치회에서 우리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엘리트 민주주의를 넘어 지역사회 공론의 장을 통한 정책 공동생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농촌사회 주체의 혁신이다. 읍면 주민자치회에 참여하고 싶은 지역주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주민자치회 구성과정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면단위 20대 청년농부와 귀농·귀촌자, 결혼이주여성 등 그동안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새로운 주체들이 발굴되고, 지역사회 공론의 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리더그룹의 집단 반발과 읍·면장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사회혁신 과정에서 한 번은 거쳐야 할 산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주민참여와 공론화이다. 읍면 주민자치회는 자신들에게 부족한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주민들과 긴밀히 소통한다. 마을을 찾아다니고, 단체들과 만나 협력방안을 모색한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고 미숙한 부분도 많지만, 몇몇 읍면 주민자치회에서 지역의제 발굴과 주민 의견수렴을 위해 개최한 주민총회 결과는 놀랍다.
면단위 주민총회에 거주민의 10% 이상(200∼300명 내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안건도 매우 다양하다. 읍내 사거리 회전교차로 전환에 대한 주민 찬반투표, 면단위 목욕탕 건립과 면내 순회택시 운영, 청년농부 육성, 지역농산물 가공사업, 면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 확대, 관내 경로당 돋보기 비치, 재활용품 정기 순회수집 등 주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안건들이다. 물론 주민들의 이러한 요구에 아직 행정은 답하지 않고 있다.
농촌혁신은 지역과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에 집중하고, 이들의 높은 수준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개방적 플랫폼(주민자치회와 같은)을 구성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이다. 풀뿌리 수준에서부터 농정의 새로운 가치와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살피고, 지역주체들 간 공론의 장을 통해 더 큰 공공의 수준으로 논의를 모아가야 한다.
출처-한국농어민신문 http://www.agrine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4920
| 서정민 지역재단 지역순환경제센터장
동원된 구성원, 단기적 성과 위해 운영
깜깜이 회의와 정책결정 되풀이
다양한 주체·수평적 의사결정 보장돼야
몇 달 전 A군 농정거버넌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지역농민과 공무원, 외부전문가 등 100여명이 참여하는 농정 거버넌스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첫째, 참여농민 대다수가 연간 농업소득 7천만 원 이상 대농이라는 점, 둘째, 지자체 보조사업의 상당부분이 이들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이들은 최근 농업계 화두인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수당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 대농들은 수도작과 시설원예, 축산 등 농업경영형태에 따라 한 농가가 여러 보조사업을 중복 지원받는 것에 대해, 기 투자된 곳에 집중 지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농업계의 화두인 ‘공익형 직불제’와 ‘농민수당’에 대해서는 모든 농가에게 균등하게 나눠주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농들의 이러한 주장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농업·농촌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주체들이 공론화 과정을 통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펼치고,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대농과 농민단체 대표 등 소수의 리더 이외에 중소농과 여성농민, 청년,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노동자 등 농촌주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공론의 장에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협치기구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거버넌스를 들여다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첫째,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행정에서 지역단체 대표들로 구성원을 결정한다. 행정에 의해 참여가 아닌 동원으로 구성원이 결정되고, 이들의 대표성은 농민과 주민들로부터 부여된 것이 아니라, 행정으로부터 부여된다는 점이다.
둘째, 논쟁과 토론을 통한 민주적 의사결정보다 단기적 성과를 위해 운영된다. 행정은 거버넌스의 운영기간과 안건도 미리 결정해 놓는다. 참여자들은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가 반영되도록 하는데 집중하고, 시혜적 관점에서 지역농민과 주민들을 위한 일부 정책과 사업을 발굴하기도 한다. 지역농민과 주민의 입장에서는 '깜깜이 회의와 정책결정'이 아닐 수 없다.
농촌중심지활성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B면 추진위원회는 중심지 2개 마을 이장과 개발위원장, 부녀회장 등 리더 10여명으로 구성되었다. 배후마을 등 다른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추진위원장은 “인원이 많아지면 시끄럽고, 시설이 들어가지 않는 배후마을 주민들은 사업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중심지와 기초생활거점사업 등 읍면단위 사업 추진위원회 구성을 소수의 지역리더 몇 명이 결정하는 것이다. 민간 역시 행정의 거버넌스 구성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거버넌스는 효율적인 회의를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론의 장이다. 거버넌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수직적 의사결정방식이 아니라, 정부와 시민사회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수평적 의사결정 방식이다. 거버넌스는 이해를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복잡하고 복합적인 연대와 분열의 반복과정이기도 하다.
소수의 엘리트가 통치하던 20세기는 관리, 통제, 폐쇄 등 전통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21세기는 다양한 주체들의 높은 수준의 참여와 협력, 공유와 개방, 수평적 관계 등 새로운 가치를 필요로 한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사업도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시대이다. 정책결정과정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명하게 개방되고, 정책을 민관이 공동으로 생산하는 수평적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제레미 하이먼즈·헨리 팀즈, 뉴파워 : 새로운 권력의 탄생)
최근 읍면단위 주민대표기구인 주민자치회에서 우리 농촌사회가 안고 있는 엘리트 민주주의를 넘어 지역사회 공론의 장을 통한 정책 공동생산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첫 번째 가능성은 농촌사회 주체의 혁신이다. 읍면 주민자치회에 참여하고 싶은 지역주민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주민자치회 구성과정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면단위 20대 청년농부와 귀농·귀촌자, 결혼이주여성 등 그동안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새로운 주체들이 발굴되고, 지역사회 공론의 장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리더그룹의 집단 반발과 읍·면장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저항은 사회혁신 과정에서 한 번은 거쳐야 할 산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주민참여와 공론화이다. 읍면 주민자치회는 자신들에게 부족한 대표성을 인정받기 위해 주민들과 긴밀히 소통한다. 마을을 찾아다니고, 단체들과 만나 협력방안을 모색한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고 미숙한 부분도 많지만, 몇몇 읍면 주민자치회에서 지역의제 발굴과 주민 의견수렴을 위해 개최한 주민총회 결과는 놀랍다.
면단위 주민총회에 거주민의 10% 이상(200∼300명 내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안건도 매우 다양하다. 읍내 사거리 회전교차로 전환에 대한 주민 찬반투표, 면단위 목욕탕 건립과 면내 순회택시 운영, 청년농부 육성, 지역농산물 가공사업, 면 초등학교 방과 후 활동 확대, 관내 경로당 돋보기 비치, 재활용품 정기 순회수집 등 주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는 안건들이다. 물론 주민들의 이러한 요구에 아직 행정은 답하지 않고 있다.
농촌혁신은 지역과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에 집중하고, 이들의 높은 수준의 참여를 이끌어 내기 위한 개방적 플랫폼(주민자치회와 같은)을 구성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오히려 더 중요할 것이다. 풀뿌리 수준에서부터 농정의 새로운 가치와 방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지 살피고, 지역주체들 간 공론의 장을 통해 더 큰 공공의 수준으로 논의를 모아가야 한다.
출처-한국농어민신문 http://www.agrine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4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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