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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농촌엔 다양한 청춘이 필요하다ㅣ정은정 농촌사회학자, 지역재단 이사
    • 작성일2023/11/09 16:44
    • 조회 205
    큰아이가 얼마 전 동아리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놀러 왔다. 친구의 엄마이기도 하지만 이들과 같은 종교동아리 출신의 선배이기도 한 내 이야기가 궁금했단다. 어디 가서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는 일은 모양이 빠져 눈치를 봐야 하는데, 입을 열라 하니 신나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주절댔다.

    내가 학생일 때는 구제금융 전후의 세기말이기도 해서 길거리로 뛰어나가 싸울 일이 많았었노라, 특히 농촌활동(농활)은 지금의 삶에도 깊게 영향을 주어 ‘농촌사회학’을 공부하기로 한 데에 중요한 계기였다 하니 동아리 활동이 진로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자기들은 종교행사와 ‘친목질’만 하는 것 같다는 자조도 보탰다.

    하지만 당시 학생운동을 목적으로 종교와 신앙을 외피로 삼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깊은 회의도 있었다 말해주었다. “그때 우리가 열심히 싸우면 내 자식들은 데모도 안 하고 종교 동아리답게 기도 열심히 하고 연애도 재밌게 하길 바랐다.” 70~80년대 민주투사들이 모진 고통을 견뎌내고 싸워준 덕분에 내가 최소한 끌려가서 고문당할 걱정은 안 하고 집회에 나갈 수 있었듯 말이다.

    내가 만난 농촌 청년 스케치

    전국적으로 청년 귀촌의 모범사례로 주목받고 있는 지역의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청년세대로 분류되는 만 19세에서 39세는 사회에서는 20대부터 40대까지이므로 동일 세대로 묶기에는 무리가 있긴 하다. 다만 지역에서 살아보고 싶어 하는 청년들을 지역과 연계하는 중간지원조직이 비교적 활발해지며 다양한 프로젝트가 굴러가고 있다. 요즘 농촌에서 유행하는 말이 ‘로컬살이’, ‘로컬크리에이터’다.

    이제 로컬푸드는 보통명사로 자리 잡았고, ‘로컬’이라 하면 수도권을 떠나 중소도시나 농어촌, ‘골목길’로 표상되는 구도심에서 살아가는 삶을 함축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로컬프로젝트의 대표적인 기획은 지역에 내려오기 전에 지역을 탐색하는 ‘살아보기 프로젝트’다. 일주일부터 한 달까지, 머무는 일정은 다양하다. 그저 재미 삼아 경험 삼을 뿐 ‘살아보기’가 ‘살기’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도시 청년들에게 로컬살이에 대한 정보가 가닿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농촌에 와서 농업과는 거리를 두고 손에 흙 묻히는 일은 피하며 농사는 누가 짓느냐며 날선 비판도 있다. 설사 농업에 종사한다고 해놓고 청년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조금만 받고 그 기간만 끝나면 튀어버렸다며 예비청년농민을 ‘보조금 먹튀족’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지역의 예산이 들어가는 살아보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청년들 중에서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온갖 체험만 한다며 농촌을 쇼핑 장소로 대하는 이들이 얄밉기도 하다.

    반면 그 지역에 태어나고 자라 뿌리를 내린 ‘집토끼’인 자신들을 보지 않고, ‘산토끼’들에게만 집중할 뿐, 자신들은 정책적으로 배제되는 것 같다며 섭섭함을 숨기지 않는다. 여기에 참여하는 이들도 프로그램이 다들 비슷하고 막상 살아보려 할 때 농촌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낭만화된 면이 있다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대안적인 삶을 추구하며 농촌으로의 이주를 결행하고 뿌리를 내리려 하니 흙이 아니라 콘크리트라며 다시 도시로의 이출을 고민하는 청년도 있다.

    이에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수행하고 있는 중장기 연구의 2022년 보고서 <청년농촌과 청년: 청년세대를 통한 농촌의 지속가능성 제고 방안>에서는 농촌으로의 이주는 ‘이사’가 아닌 ‘이민’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제언을 하고 있다. 삶의 자리를 옮기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지는 이주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주를 받아들이는 지역도 마찬가지다.

    외국으로 이민을 가려면 어학도 배워야 하고 그 지역의 독특한 문화도 사전에 미리 학습하고 가듯 말이다. 철저하게 준비해도 사건·사고는 매일매일 터지기 마련이다. 하여 가려는 사람과 받아들이려는 농촌 모두 마음의 준비, 실무적인 준비, 그리고 중앙정부는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생태적·대안적 그리고 경제적인

    현재 70세 전후의 고령농들은 10년 뒤쯤이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를 줄이거나 이탈을 할 수밖에 없다. 기계로 짓는 벼농사 정도를 빼고 근력과 지력 모두가 필요한 채소와 과수, 축산업은 후계의 구도를 어떻게 짜야 할지 정부도 농촌사회도 고민이 깊다. 가장 바람직한 유형이라면 현재 농업에 종사 중인 (조)부모의 농지와 기술을 승계하고, 사회의 지원을 받아 농업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 방법이야말로 농업 안정성과 먹거리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고 도시민들도 바라는 모델이다.

    종종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농업 콘텐츠를 보면 성공한 청년 후계농 이야기가 주다. 이들은 다양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속도가 빠르고 스마트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높다. 기술적 혁신을 이루어 생산한 1차 농산물을 매력적인 2차 3차 상품으로도 가공하고, 온라인 판로 개척과 홍보에도 익숙하며 미디어를 다루는 진정한 ‘크리에이터’로의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에 결혼까지 하여 어린 자녀들이 집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3대가 삼겹살 파티라도 하는 장면으로 대망의 마무리. 농촌 문제에 비판적인 편인 나도 이런 장면을 보면 흐뭇할 정도지만 이 사례가 매우 드문 사례라는 것도 잘 안다. 현실은 너무 험난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읽고 싶은 것만 읽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생태적이고 대안적인 삶의 공간으로 농촌을 인식하고 이주를 고민하는 청년들도 있지만 분명 산업으로서의 농업, 즉 경제적 가능성과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접근한 청년농들도 있다. 이런 목적으로 농촌에 진입한 청년농들을 만날 기회가 좀처럼 없다가 청년 승계농 의무교육의 한 꼭지를 맡은 적이 있다. 실제 농민도 아니고 교수도 아닌 내가 뭘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기회로 여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강의는 망했다. 논으로 하우스로 다니던 이들이 책상 의자에 앉으면 당연히 눈을 감기 마련이지만 어떻게 해서든 눈을 뜨고 허리를 곧추 세우려는 그 마음에 홀려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날은 대놓고 엎드려 자는 이들도 있고, 아예 코앞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는 이도 있어 자존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엄동설한이었는데 어찌나 진땀을 뺐는지 한여름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농사짓느라 얼마나 피곤할까 싶으면서도 화가 났다. 승계농 자격을 갖추지 못해 농지와 정책자금을 구하러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또래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느냐, 이 교육도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인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화를 내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동안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이들만 만났을 뿐, 세계를 조금도 확장시키지 못했던 것임을 깨달았다. 환대해주는 꽃자리만 찾아다녔던 것인데 이를 마치 내 능력으로 착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날의 경험이 내겐 큰 공부가 되었다. 엎드려 자고 게임을 하던 청년농들도 쉬는 시간에는 일어나 서로서로 농작물 생육 상태와 시세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허를 찔린 셈이다. 지원금과 교육, 컨설팅까지 한묶음으로 빠질 수 없어 참여한 것인데, 뜬구름 잡는 내 이야기가 농업으로 돈을 벌고 싶은 이들에게 닿았을 리가 없다. 이들의 욕구를 나도 무시한 것이다.

    그동안 청년들에게 비어가는 농촌을 채우라고, 불안한 식량안보를 책임지라며 공적자금을 받았으니 그 정도는 해내라며 청년들을 도구화하는 기조에 비판을 해왔건만 나도 그런 기성세대의 한 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농사도 짓고, 지역 과소화도 막고, 사회의식에도 눈을 떠서 아스팔트 농사도 지으라 등을 떠밀었다.

    그래도 존재를 믿어야 하는 이유

    지난봄 지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농촌과 먹거리 문제로 강의를 했다. 몇 명이나 오겠나 싶어 처음부터 기대가 없었으나 자리를 꽉 채운 학생들을 보고 내가 더 당황했다. 이들은 확실히 ‘기후위기’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는 곧 먹거리의 위기와 직결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먹거리의 생산 공간인 농촌과 농업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래서 코로나 이후에 모집한 대학생 농활에 의외로 지원자가 넘쳐났던 것이다.

    물론 3박 4일 농활 다녀온다고 농업의 현실을 자각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그들의 ‘친목질’이고 추억쌓기일 수도 있다. 그래도 방학 때 ‘시골 할머니댁’에라도 놀러 간 경험이 있는 경우, 직간접적으로 농촌에서의 관광이나 체험을 해본 경우가 농촌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위에 인용한 연구의 결과다.

    물론 그 긍정 이미지가 막상 내가 살아야 할 시공간이면 처절하게 박살 날 수도 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농촌의 삶을 선택한 청년들의 만족도가 또래 도시 청년보다는 높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도시에서도 ‘무산자’에 가까운 청년들의 경우 농촌에서 높은 소득이 아닌 적정한 소득 활동을 할 수 있다면 삶의 만족도는 도시보다 높다는 것이다. 물론 불편함도 동반된다. 주거를 마련할 자산이 없는 청년들에게 지역이 내주는 청년 주택은 엄연히 성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학생 기숙사를 운영하듯 한다.

    게다가 청년은 원룸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상정해 버리고 ‘결혼’을 전제로 제대로 된 주택을 얻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공간 정도로 여긴다는 점이다. 여기에 농촌의 열악한 의료와 복지, 교육의 문제도 농촌에서 사는 일을 힘들게 하지만 일단 얕은 뿌리라도 내리면 농촌에서의 삶을 지속하려 한다는 것이다. 물론 삶의 배경과 성별과 나이, 경제적 형편에 따라 다양한 욕구와 요구들이 있지만 적어도 삶의 자리를 옮겨온 그 청년들은 용기를 낸 존재이고 자리를 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면 고령화된 농민운동은 농촌에서 살아보겠다는 청년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준비할 것인가. 청년들에게 농촌에서 함께 살아가 보자, 동료가 되어보자는 말을 건네기가 망설여질 것이다. 국가가 정책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농업과 농촌을 등한시하면서도 청년농민을 육성한다는 호언장담의 모순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40년 전 농고를 다닐 때 담임교사가 30년 뒤에는 농민들이 큰소리를 칠 세상이 올 것이라 했는데 과연 그 세상이 왔느냐는 늙은 농민의 되물음을 생각해 보면 말이다.

    하지만 도시를 떠나 농촌에 (비록 마을이 아니라 읍내여도) 살아보겠다는 청년들에게 성과를 빨리 내라 조바심을 내는 행정을 제어하고 시간을 벌어주는 선배의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 혹여 농사를 짓겠다 하면 빚을 내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을 나눌 수 있고 기꺼이 자신의 농사일지를 꺼내 보이며 준비를 시킬 수도 있다. 농민운동이 열심히 투쟁하고 살아왔던 역사는 청년세대의 좌충우돌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부해야 한다. 딸아이의 친구들이 데모는 안 하고 모여서 놀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고 내가 자부할 수 있듯 말이다.

    하여 한동안은 철없이 이 지역 저 지역을 배회하는 청년들도 조바심 내지 않도록 지역사회를 다독일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우리 지역이 아니어도 다른 지역의 농촌에서라도 살아간다면 이 또한 좋은 일 아닌가 하고 말이다. 농촌의 청년을 존재로 대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정은정의 밥심글심 https://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2003&fbclid=IwAR3AP9Bc4U-7grCu2B6hVVRcSpyYThV-2gl9_xoVZtARKvDyjRFgkW8Rb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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