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경제학자가 행복경제학을 찾아간 까닭은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2/12/05 15:05
- 조회 447
지난 2년간 <가보세>에 매월 초 원고지 30매 분량의 글을 기고해왔다. 내 글에 관심을 보인 독자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두 가지 질문을 했다.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나온 것으로 아는데 왜 굳이 농업경제학을 전공했느냐. 농업경제학을 하면서 왜 행복경제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느냐.
필자는 한국전쟁 중에 강원도의 반농·반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의 거의 모든 농촌이 그랬듯이 내가 살던 마을도 참으로 가난했다.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어부들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갔다. 어린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철이 들면서 우리 동네만 못사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한 이유다. 대학입시 면접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해 면접관 교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왜 농업경제학인가
왜 하필 농업경제학이냐.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1970년에 우리나라는 가난한 농업 국가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254달러(2020년 현재 3만1,727달러), 전체인구 가운데 농가인구 46%(2020년 4.3%), 전체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취업자가 50.4%(2020년 4.5%)였다.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업이 발전해야 하고 농민이 잘 살아야 했다. 경제학도가 농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학내 잡지(상대평론)에 일제 강점기의 소작문제에 관한 작은 논문을 발표한 이래 대학원에서 줄곧 농업경제 연구에 매진했다. 사실 그 무렵 많은 경제학도들이 농업경제를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산업화하면서 농민들이 이농했듯이 경제학자들도 이농하여 전공을 바꿔갔다. 유학 등 몇 차례 전공을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못난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분야에는 한눈팔지 않고 전업농 경제학을 고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농업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농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고, 학생들과 농활을 하고, 텃밭을 조금 일궈본 것 외에는 농사경험도 없다. 내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에게 명강의(?)를 듣는 조건으로 매 학기 2박 3일 혹은 3박 4일의 농활을 강하게 권장했다. 초기에는 경제학과에서 웬 농활이냐는 반발도 없지 않았다. 나는 길게 농활의 의의를 설명하고, “너도 나도 밥 먹고 산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농사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농업보다는 농민이 나의 주된 관심이었다. 대학원 석·박사 논문은 모두 ‘농민층분해’에 관한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동질적이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포섭되면서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으로 나눠지는가를 연구했다. 나는 초기에는 정통 마르크스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농민층 내부의 계급적 분해(지주와 소작농, 부농과 빈농)를 연구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에 의한 농업지배, 농업기계화(시설화·현대화) 등이 진전되면서 농민층 내부의 고용-피고용(착취-피착취)이라는 기본모순보다는 농업 외부의 자본과 국가에 의한 농민수탈이 주된 모순으로 전화한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국가의 농업정책을 주로 연구했다.
연구와 실천, 지역재단의 창립
농업경제를 연구하면서 관심 영역을 농촌경제와 지역경제로 넓혀갔다. 농업은 농민이 경제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이지만, 농민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업뿐 아니라 농민들의 삶의 공간인 농촌이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촌이 경제, 사회문화, 환경을 아우르는 삶의 공간으로 발전해야 한다. 농업은 농촌경제의 기간산업으로 가장 중요하지만, 농업만으로는 농촌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돼야 한다.
농촌은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도시와 깊은 연관 속에서 존립한다. 농촌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상생해야 한다. 연구 영역을 무한정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농촌과 직접적 혹은 밀접한 관계 하에 있는 시·군 범위의 지역문제를 주로 고민했다.
나는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 은사이신 서울대 정영일 교수님을 모시고 1993년 농정연구포럼을 만들고 이것을 2001년 농정연구센터로 확대해 6년간 초대 소장을 맡았다. 농정연구센터는 주로 농업, 농촌, 식품 관련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는 일종의 싱크탱크였다. 우리는 좋은 정책을 많이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지엽말단적인 개선이 아니라 농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정치권과 관료 심지어 학계)이 변화를 거부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하듯이 농촌 현장이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극복할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역리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말한 지역리더란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혹은 조직)’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리더가 학습하고 연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기 위해, 2004년 ‘지역을 바꾸어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하고 겁 없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역재단을 창립했다.
농업·농촌·농민의 현실, 우리 사회의 외로운 섬
그러나 3농(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나날이 나빠졌다. 농업·농촌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데…. 과거에 비하면 농사짓기도 수월해지고 농민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은 놀랄 만큼 향상됐는데 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까. 왜 농촌은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진 자연 양로원으로 변해갈까.
심지어 농촌뿐 아니라 ‘지방소멸’이란 말이 매스컴이나 정치권서 태연하게 운위된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로 인해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생활서비스가 악화하여 살기가 예전보다 더 힘들어지고, 농사가 수지맞지 않아 적은 농사로는 살 수가 없으니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겁나게 늘어나는 것은 빚이다. 농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3농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최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아득한 옛 이야기다. 내가 가끔 미디어에 기고하다 보면, 비농업계의 신문은 그 제목에 농(農)자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거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3농은 우리 사회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1960년대 개발독재 이래 우리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경제성장지상주의다. ‘경제는 무한히 성장하며’,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니’,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좋다’는 일종의 도그마다. 경제성장지상주의에 의하면 농업과 농촌은 경제성장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대상이다. 물론 국가가 일부러 희생을 시킬 리 없지만 한정된 자원을 대도시와 공업화에 편중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다. 과거에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여동생들은 학교 보내지 않고 희생시킨 것과 같다.
경제성장은 국내총생산(GDP)의 증대로 측정한다. 농림어업은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낮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진다. 성장주의는 공업화 초기에는 농업의 발전보다는 경제성장을 위한 농업의 역할(값싼 식량과 노동력 제공, 공업화를 위한 시장과 자본조달 수단 등)에만 주목하고, 경제가 성장한 이후의 세계화 시대에는 농업을 경제성장을 위한 걸림돌로 인식(시장개방을 저해하는 보호 대상으로 치부)한다.
농업과 농촌을 희생하면서까지 경제성장에 ‘올인’한 덕에 우리나라는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훌쩍 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2010년 7월부터 3년간 충남발전연구원(현 충남연구원)장으로 파견 근무했다. 이 무렵 충청남도는 2000년대 10년 동안 연평균 9%의 놀라운 성장을 달성했다. 전국 평균의 2~3배에 달하는 성장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말하면 대부분의 도민들은 그러한 성장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도권 재벌 대기업이 진출한 소수의 지역(아산과 천안, 당진 등)에 성장이 한정되고 성장의 과실이 그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결성하다
‘성장과 행복’의 괴리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의 글을 통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을 만났다(<한국농정> 1017호 ‘가보세’ 참조). 1인당 소득이 우리나라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나라가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하고 외국인 여행객까지 무상의료를 제공한다. 그 비결은 ‘국내총생산(GDP)보다 국민총행복(GNH)이 더 중요하다’는 국정 철학이다.
연구원에 행복연구팀을 꾸리는 한편 부탄을 2011년 10월에 방문하여 국민총행복 정책에 대해 공부했다. 그 후 매 2년마다 관심 있는 동료들과 함께 부탄을 방문했다(지난 10월에 여섯 번째 방문). 2011년 11월 유엔총회는 “행복은 인간의 근본적 목표이고, 보편적인 열망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은 그 성질상 그러한 목표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특별 결의를 통해 전체론적 발전(holistic development)을 위해 ‘행복’을 목표로 할 것을 권고했다.
‘부탄 방문을 함께해온 동지들’이 중심이 돼 2018년 4월 200여명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결성했다. 행복포럼은 창립 선언문에서 성장주의 시대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리사회의 목표를 국민총행복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경제성장주의 극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
경제성장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농업·농촌의 미래는 어둡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은 행복해질 수 없다. 경제성장은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1972년)와 1992년 개정판 <한계를 넘어서>에서 지적했듯이 지구의 수용능력 한계를 넘어섰다(<한국농정> 1013호 ‘가보세’ 참조). 그 결과 기후변화가 오늘날 인류의 앞날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물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행복은 물질적 조건과 함께 사회문화적, 정서적, 생태적 필요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동시에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된다. 부탄 초대 민선 총리 지그메 틴레이의 다음 말은 큰 울림을 준다.
“행복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으면서 사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 때, 당신 자신의 행복이 증진될 기회가 증대하고 그만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으로 책임성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국민총행복을 위해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를 재인식해야 한다. 국민총행복을 위해서는 농업·농촌이 국민을 위한 삶터, 일터, 쉼터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농업과 농촌은 국민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은 식량생산 이외에 농업생산으로부터 파생되는 경제적· 사회문화적· 환경적 기능(multifuctionality)을 다양하게 수행한다. 일자리, 먹을거리, 환경, 문화, 경관, 공동체, 교육, 건강, 여가, 정서안정 등 국민 행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가 충분히 발현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
2019년 4월부터 1년 동안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농정대전환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대통령이 외면하는 대통령 자문기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한국농정> 929호 ‘가보세’ 참조). 시민들과 농어민들에게 ‘농어민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고 직접 호소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도올 김용옥 선생을 모시고 뜻을 같이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함께 전국 8개도 18개 시·군을 순회하며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을 진행했다(<한국농정> 960호 ‘가보세’ 참조). 전국에서 2,00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가는 농정대전환 3강 6략’을 함께 토론했다.
무엇보다도 농업과 농촌을 망치는 농업생산보조금과 지역개발보조금을 대폭 줄여, 농민에게는 공익적 기여 직접지불을 확대하고, 농어촌주민에게는 1인당 월 30만원의 수당을 직접지급하자는 주장에 대행진 참여자들은 큰 관심을 가졌다(<한국농정> 965·977호 ‘가보세’ 참조). 코로나19 시국임에도 대행진과 민회에는 농민뿐 아니라 일반 시민 등 참으로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열기는 뜨거웠다.
대행진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세상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다. 한 번의 대행진으로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이 실현되리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민초들의 열망이 달성될 때까지 전인권의 노래처럼 ‘행진, 행진, 행진’은 계속돼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기는 멈추고 전국을 주유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지역의 동지들을 만나고 싶다. 그동안 변변치 않은 글을 읽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빈 박진도의 가보세’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9246
필자는 한국전쟁 중에 강원도의 반농·반어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무렵의 거의 모든 농촌이 그랬듯이 내가 살던 마을도 참으로 가난했다. 하루 세 끼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고, 어부들은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갔다. 어린 나는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철이 들면서 우리 동네만 못사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선택한 이유다. 대학입시 면접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우리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다”고 말해 면접관 교수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왜 농업경제학인가
왜 하필 농업경제학이냐. 내가 대학을 입학하던 1970년에 우리나라는 가난한 농업 국가였다. 1인당 국내총생산은 254달러(2020년 현재 3만1,727달러), 전체인구 가운데 농가인구 46%(2020년 4.3%), 전체 취업자 가운데 농림어업취업자가 50.4%(2020년 4.5%)였다.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농업이 발전해야 하고 농민이 잘 살아야 했다. 경제학도가 농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대학 2학년 때 학내 잡지(상대평론)에 일제 강점기의 소작문제에 관한 작은 논문을 발표한 이래 대학원에서 줄곧 농업경제 연구에 매진했다. 사실 그 무렵 많은 경제학도들이 농업경제를 공부했지만 우리나라 경제가 산업화하면서 농민들이 이농했듯이 경제학자들도 이농하여 전공을 바꿔갔다. 유학 등 몇 차례 전공을 바꿀 기회가 있었지만, 못난 소나무가 고향을 지킨다는 말이 있듯이 다른 분야에는 한눈팔지 않고 전업농 경제학을 고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농업경제학자가 아니었다. 농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니 말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고, 학생들과 농활을 하고, 텃밭을 조금 일궈본 것 외에는 농사경험도 없다. 내 강의를 듣는 모든 학생에게 명강의(?)를 듣는 조건으로 매 학기 2박 3일 혹은 3박 4일의 농활을 강하게 권장했다. 초기에는 경제학과에서 웬 농활이냐는 반발도 없지 않았다. 나는 길게 농활의 의의를 설명하고, “너도 나도 밥 먹고 산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덕분에 나도 다양한 농사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농업보다는 농민이 나의 주된 관심이었다. 대학원 석·박사 논문은 모두 ‘농민층분해’에 관한 것이었다. 전통사회에서 동질적이었던 농민들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포섭되면서 어떻게 서로 다른 계층으로 나눠지는가를 연구했다. 나는 초기에는 정통 마르크스 경제학의 영향을 받아 농민층 내부의 계급적 분해(지주와 소작농, 부농과 빈농)를 연구했다. 그러나 국가와 자본에 의한 농업지배, 농업기계화(시설화·현대화) 등이 진전되면서 농민층 내부의 고용-피고용(착취-피착취)이라는 기본모순보다는 농업 외부의 자본과 국가에 의한 농민수탈이 주된 모순으로 전화한 것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국가의 농업정책을 주로 연구했다.
연구와 실천, 지역재단의 창립
농업경제를 연구하면서 관심 영역을 농촌경제와 지역경제로 넓혀갔다. 농업은 농민이 경제적 삶을 영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토대이지만, 농민이 잘 살기 위해서는 농업뿐 아니라 농민들의 삶의 공간인 농촌이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농촌이 경제, 사회문화, 환경을 아우르는 삶의 공간으로 발전해야 한다. 농업은 농촌경제의 기간산업으로 가장 중요하지만, 농업만으로는 농촌경제가 유지될 수 없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일자리가 창출돼야 한다.
농촌은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도시와 깊은 연관 속에서 존립한다. 농촌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시와 상생해야 한다. 연구 영역을 무한정 확대할 수 없기 때문에, 농촌과 직접적 혹은 밀접한 관계 하에 있는 시·군 범위의 지역문제를 주로 고민했다.
나는 연구만 한 것이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 은사이신 서울대 정영일 교수님을 모시고 1993년 농정연구포럼을 만들고 이것을 2001년 농정연구센터로 확대해 6년간 초대 소장을 맡았다. 농정연구센터는 주로 농업, 농촌, 식품 관련 분야의 정책을 연구하는 일종의 싱크탱크였다. 우리는 좋은 정책을 많이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 이유는 지엽말단적인 개선이 아니라 농정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기득권(정치권과 관료 심지어 학계)이 변화를 거부했고,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하듯이 농촌 현장이 스스로 기존의 질서를 극복할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지역리더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말한 지역리더란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혹은 조직)’을 말한다. 이러한 지역리더가 학습하고 연대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기 위해, 2004년 ‘지역을 바꾸어 세상을 바꾼다’는 거창하고 겁 없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지역재단을 창립했다.
농업·농촌·농민의 현실, 우리 사회의 외로운 섬
그러나 3농(농업, 농촌, 농민)의 현실은 나의 기대와는 달리 나날이 나빠졌다. 농업·농촌의 발전을 위해 많은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노력을 하는데…. 과거에 비하면 농사짓기도 수월해지고 농민들의 물질적 생활 수준은 놀랄 만큼 향상됐는데 왜 농민들은 농촌을 떠날까. 왜 농촌은 아이 울음소리가 끊어진 자연 양로원으로 변해갈까.
심지어 농촌뿐 아니라 ‘지방소멸’이란 말이 매스컴이나 정치권서 태연하게 운위된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로 인해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면서 생활서비스가 악화하여 살기가 예전보다 더 힘들어지고, 농사가 수지맞지 않아 적은 농사로는 살 수가 없으니 규모를 키워야 하는데 겁나게 늘어나는 것은 빚이다. 농민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가고, 3농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거의 최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은 아득한 옛 이야기다. 내가 가끔 미디어에 기고하다 보면, 비농업계의 신문은 그 제목에 농(農)자가 들어가는 것을 싫어한다.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거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3농은 우리 사회에서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이다.
왜 이렇게 됐을까. 1960년대 개발독재 이래 우리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경제성장지상주의다. ‘경제는 무한히 성장하며’,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니’,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것들은 희생해도 좋다’는 일종의 도그마다. 경제성장지상주의에 의하면 농업과 농촌은 경제성장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대상이다. 물론 국가가 일부러 희생을 시킬 리 없지만 한정된 자원을 대도시와 공업화에 편중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희생되는 것이다. 과거에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여동생들은 학교 보내지 않고 희생시킨 것과 같다.
경제성장은 국내총생산(GDP)의 증대로 측정한다. 농림어업은 일반적으로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낮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진다. 성장주의는 공업화 초기에는 농업의 발전보다는 경제성장을 위한 농업의 역할(값싼 식량과 노동력 제공, 공업화를 위한 시장과 자본조달 수단 등)에만 주목하고, 경제가 성장한 이후의 세계화 시대에는 농업을 경제성장을 위한 걸림돌로 인식(시장개방을 저해하는 보호 대상으로 치부)한다.
농업과 농촌을 희생하면서까지 경제성장에 ‘올인’한 덕에 우리나라는 오늘날 1인당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훌쩍 넘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만, 국민들은 행복하지 않다. 2010년 7월부터 3년간 충남발전연구원(현 충남연구원)장으로 파견 근무했다. 이 무렵 충청남도는 2000년대 10년 동안 연평균 9%의 놀라운 성장을 달성했다. 전국 평균의 2~3배에 달하는 성장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말하면 대부분의 도민들은 그러한 성장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수도권 재벌 대기업이 진출한 소수의 지역(아산과 천안, 당진 등)에 성장이 한정되고 성장의 과실이 그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결성하다
‘성장과 행복’의 괴리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때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의 글을 통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나라’ 히말라야의 작은 왕국 부탄을 만났다(<한국농정> 1017호 ‘가보세’ 참조). 1인당 소득이 우리나라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 나라가 대학까지 무상교육을 하고 외국인 여행객까지 무상의료를 제공한다. 그 비결은 ‘국내총생산(GDP)보다 국민총행복(GNH)이 더 중요하다’는 국정 철학이다.
연구원에 행복연구팀을 꾸리는 한편 부탄을 2011년 10월에 방문하여 국민총행복 정책에 대해 공부했다. 그 후 매 2년마다 관심 있는 동료들과 함께 부탄을 방문했다(지난 10월에 여섯 번째 방문). 2011년 11월 유엔총회는 “행복은 인간의 근본적 목표이고, 보편적인 열망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은 그 성질상 그러한 목표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특별 결의를 통해 전체론적 발전(holistic development)을 위해 ‘행복’을 목표로 할 것을 권고했다.
‘부탄 방문을 함께해온 동지들’이 중심이 돼 2018년 4월 200여명의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결성했다. 행복포럼은 창립 선언문에서 성장주의 시대와 결별을 선언하고 우리사회의 목표를 국민총행복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했다.
경제성장주의 극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
경제성장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농업·농촌의 미래는 어둡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은 행복해질 수 없다. 경제성장은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1972년)와 1992년 개정판 <한계를 넘어서>에서 지적했듯이 지구의 수용능력 한계를 넘어섰다(<한국농정> 1013호 ‘가보세’ 참조). 그 결과 기후변화가 오늘날 인류의 앞날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물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행복은 물질적 조건과 함께 사회문화적, 정서적, 생태적 필요의 조화로운 균형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동시에 행복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실현된다. 부탄 초대 민선 총리 지그메 틴레이의 다음 말은 큰 울림을 준다.
“행복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으면서 사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기여할 때, 당신 자신의 행복이 증진될 기회가 증대하고 그만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으로 책임성 있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국민총행복을 위해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를 재인식해야 한다. 국민총행복을 위해서는 농업·농촌이 국민을 위한 삶터, 일터, 쉼터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다해야 한다. 농업과 농촌은 국민 행복에 필수불가결한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뿐만 아니라, 농업은 식량생산 이외에 농업생산으로부터 파생되는 경제적· 사회문화적· 환경적 기능(multifuctionality)을 다양하게 수행한다. 일자리, 먹을거리, 환경, 문화, 경관, 공동체, 교육, 건강, 여가, 정서안정 등 국민 행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들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가 충분히 발현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
2019년 4월부터 1년 동안 대통령직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농정대전환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나 자신의 부족함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대통령이 외면하는 대통령 자문기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한국농정> 929호 ‘가보세’ 참조). 시민들과 농어민들에게 ‘농어민이 행복해야 국민이 행복하다’고 직접 호소하기로 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올 1월까지 도올 김용옥 선생을 모시고 뜻을 같이하는 각계각층의 인사들과 함께 전국 8개도 18개 시·군을 순회하며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대행진’을 진행했다(<한국농정> 960호 ‘가보세’ 참조). 전국에서 2,00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수많은 사람이 모여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가는 농정대전환 3강 6략’을 함께 토론했다.
무엇보다도 농업과 농촌을 망치는 농업생산보조금과 지역개발보조금을 대폭 줄여, 농민에게는 공익적 기여 직접지불을 확대하고, 농어촌주민에게는 1인당 월 30만원의 수당을 직접지급하자는 주장에 대행진 참여자들은 큰 관심을 가졌다(<한국농정> 965·977호 ‘가보세’ 참조). 코로나19 시국임에도 대행진과 민회에는 농민뿐 아니라 일반 시민 등 참으로 많은 사람이 참여했고 열기는 뜨거웠다.
대행진의 열기는 뜨거웠지만 세상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다. 한 번의 대행진으로 ‘국민총행복과 농산어촌 개벽’이 실현되리라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다. 민초들의 열망이 달성될 때까지 전인권의 노래처럼 ‘행진, 행진, 행진’은 계속돼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기는 멈추고 전국을 주유하며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지역의 동지들을 만나고 싶다. 그동안 변변치 않은 글을 읽고 격려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소빈 박진도의 가보세’는 이번호를 끝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성원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9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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