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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벼랑 끝으로 질주하는 윤석열 성장주의 열차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고문, 충남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2/10/09 10:04
    • 조회 326
    '성장의 한계' 발간 50주년에 부쳐

    필자는 4년 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국민총행복전환포럼’을 창립하여,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경제성장에서 국민총행복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왜 ‘경제성장에서 국민총행복으로의 전환’인가?

    50년 전 <성장의 한계>가 예측한 지구의 미래

    1972년 로마클럽이 발표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가 올해로 발간 50주년을 맞이했다. <성장의 한계>는 ‘성장으로부터 지구 균형으로의 전환’을 촉구했다. <성장의 한계>에서 미국 MIT 연구팀은 컴퓨터 모델(월드3)을 이용해 인구, 식량생산, 산업화, 공해, 자원고갈의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지금 추세대로 지속되면, 지구는 100년 안에 성장의 한계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렇지만, 연구팀이 지구의 미래를 반드시 암울하게 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추세를 바꾼다면 먼 미래까지 생태적 경제적 안정 상태를 확립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구의 균형 상태가 실현된다면, 지구상의 각 사람은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를 충족하며 각자의 인간 잠재력을 실현할 평등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현재의 추세를 변경하기 위한 노력이 빠를수록 성공 가능성은 더 커질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만약 이 추세를 바꾸지 못한다면, 지구 시스템의 통제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붕괴가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것은 21세기 중후반이 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발표했다.

    <성장의 한계>는 지금까지 전 세계에 37개 언어로 번역돼 3,0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러나 서구의 성장기반 경제모델에 기득권을 가진 힘 있는 사람들(산업계, 정치인, 경제학자 심지어 마르크스 경제학자, 제3세계 옹호자 등)은 <성장의 한계>를 거부했다. 보고서가 나오자마자 컬럼비아 대학의 경제학자 피터 파셀은 <뉴욕타임즈>에 “공허한 잘못된 작업”이라고 비판하고, “쓰레기를 집어넣으면 쓰레기 나온다는 컴퓨터의 오래된 격언을 재발견하였다”고 맹비난했다.

    경제학자들은 보고서 모델의 정확성을 비판하고, 기술진보와 시장 메커니즘이 ‘성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1969년 7월 21일)에 열광한 대중들 역시 ‘성장의 한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남성과 여성이 자유롭게 꿈을 쫒을 때 성장에 큰 한계가 없다”고 선언했다.

    “무한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

    <성장의 한계> 출간 이후 수많은 비판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결론(예측)은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연구과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다만 그들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과 연구자들이 ‘성장으로부터 지구 균형으로의 전환’이라는 거대한 전환의 시기를 이해하고 함께 준비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199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존 스케일 에버리(John Scales Avery)는 “<성장의 한계>는 정확성이 결여되어 있었지만, 유한한 행성에서 무한한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기본 테제는 의심할 여지없이 옳았다”고 했다.

    <성장의 한계>는 출간 20주년(1992년)을 맞이하여 <한계를 넘어서>(Beyond the Limits)라는 개정판을 냈다. 여기에서 저자들은 인류가 이미 지구의 수용능력 한계를 넘어갔다는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주류 사회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했다. 2004년에는 <성장의 한계: 30년 업데이트>(The Limits to Growth The 30-Year Update)를 발간했다. 저자들은 지난 30년 동안 기술과 제도 그리고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약간의 진보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1972년보다 더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우리는 세계자원을 회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이용하고 있고, 지구가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폐기물과 오염물질을 방출하는 심각한 오버슈트(overshoot)의 세계에 살고 있다. 인류는 지난 30년 동안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을 낭비하였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21세기에 오버슈트의 심각한 영향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경고는 또 무시됐다. 네 명의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데니스 메도즈(Dennis Meadows)는 50주년 기념 인터뷰(2022년 2월: 국민총행복전환포럼 블로그 “<성장의 한계>는 옳았다”)에서 지구가 이미 지속가능한 수준을 훨씬 능가했고,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식량위기·팬데믹 … 경고를 무시한 대가

    세계는 <성장의 한계>가 제시한 ‘표준 시나리오’(특별한 개입 없이 지금 하는 대로 그대로 하는 경우)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표준 시나리오에서는 글로벌 시스템이 1972년부터 2020년경까지 성장하여 정점에 도달한 후에 쇠퇴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했다. 저자들은 1972년에 325ppm이었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2000년에 380ppm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이산화탄소의 농도는 2000년에 370ppm, 지금은 420ppm을 넘어섰다.

    이는 인류 역사 400만 년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으로, 이산화탄소 농도는 매년 3ppm씩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성장의 한계>가 제기한 경고를 무시한 대가(경제 불황, 생태계 파괴와 기후변화, 식량위기, 팬데믹 등)를 치르고 있다. 왜 인류는 <성장의 한계>의 경고를 무시하고 파멸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카산드라의 경고를 무시하고 그리스의 목마를 끌어들여 멸망한 트로이의 길을 갈 것인가.

    <성장의 한계>가 거부된 것은 현재 시스템에서 부와 정치권력을 얻은 사람들이 다른 누군가가 변화를 권고할 때 저항하기 때문이다. 주류 사회는 인간예외주의, 무한 성장 및 부의 끝없는 확장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성장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데니스 메도즈는 “어떤 사람들이 원자로를 건설하여 수백만 달러를 벌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핵 논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책임을 모두 기득권의 이기주의에만 돌릴 수는 없다. 저자의 한 사람인 도넬라 메도즈는 사망(2001년) 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재난이 올 거라고 말하면 방향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미래와 나쁜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분명 좋은 미래를 선택할 테니까. 참 순진했죠?”

    호모사피엔스는 생존가치를 중시하여 장기보다는 단기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 결과 우리의 정신이나 제도는 그에 맞도록 형성돼왔고, 우리는 시간 지평의 악순환(time horizon vicious cycle)에 빠졌다. 사람들은 위기가 오면 점점 더 단기에 초점을 맞추어 시간 지평이 좁아지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행동을 하지 못한다. 위기가 악화하면 시간 지평은 더욱 좁아지고, 잘못된 의사결정이 늘어나고 위기는 증폭된다.

    경제성장주의에서 벗어나야 산다

    데니스 메도즈는 온실가스의 배출량을 순제로(net zero)로 줄이더라도 기후변화를 피할 수 없다고 한다. IPCC의 <지구온난화 1.5℃> 특별보고서(2018년)는 지구의 평균온도 상승을 산업화 이전 수준보다 1.5℃ 이하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0년 배출량 대비 최소 45% 감축하고, 2050년에는 전 지구적인 탄소중립을 이뤄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50년 전 <성장의 한계>를 출간한 1972년에는 지구에 대한 인류의 영향은 지속가능한 수준(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보다 낮았으며, 그 당시의 목표는 한계에 도달하기 전에 상황을 늦추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간의 활동규모는 지구의 한계를 훨씬 넘어섰다. 오늘 우리의 목표는 속도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구를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다시 끌어내리는 것이어야 한다(데니스 메도즈).”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욕구 수준이 얼마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구상의 80억명 모두가 우리가 기대하는 생활수준으로는 살 수는 없다. 데니스 메도즈는 만약 우리가 서구 사람들이 향유하는 생활수준과 정치적 상황을 열망한다면, 아마도 10억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데니스 메도즈는 50주년 인터뷰에서 ‘평화롭고, 공평하며, 자유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욕구를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의 희망과는 매우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강대국들은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자 부족한 자원 확보를 위해 정치적 군사적 갈등을 심화하고 있다. 미-중 간의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간 전쟁의 배경에는 모두 자원 문제가 있다.

    심지어 대자본과 강대국은 우주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지구의 한계를 벗어나 무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우주에서 지구자원을 대체할 새로운 자원을 찾고 그 대신에 지구 쓰레기를 우주에 버리려고 한다. 종국에 인류를 파멸로 이끌 원자력 핵발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태풍이 몰아칠 것을 알면서도 요행수에 기대어 갈 데까지 가보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바보 같은 짓거리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경제성장주의는 경제는 무한히 성장하고, 경제가 성장하면 모든 것이 좋아진다는 믿음이다. 심지어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다른 가치들은 희생해도 좋다고 한다.

    <성장의 한계>는 성장주의에 대한 강력한 경고이다. 빈발하는 기후재난과 팬데믹 그리고 심화하는 불평등은 성장주의의 종언을 재촉하고 있다. 유럽 여러 나라들과 호주, 뉴질랜드 등 주요 선진국들은 초국적 대자본이 지배하는 성장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사회의 패러다임을 경제성장이 아닌 지속가능성과 웰빙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윤석열정부, 대한민국의 시계 거꾸로 돌리나

    이에 반해 우리나라 정부는 ‘경제성장’에 ‘올인’하는 성장주의로 시대의 흐름에 역주행하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극단적 성장주의를 표방한 윤석열정부는 대한민국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고 있다. 욕망의 무한 자극, 자본을 위한 최대 자유 보장, 규제완화와 난개발, 부자 감세와 복지지출 삭감, 노동과 시민사회 억압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더욱이 2050년에 온실가스 배출량 순제로(net zero)라는 전 지구적 과제에 역행하여, 지난 정부의 미흡한 탄소중립계획조차 포기하고, 탈원전은커녕 원자력발전을 국가핵심발전전략으로 채택하고 있다. 원전은 재생에너지의 대안이 될 수도 없고, 핵폐기물은 우리의 삶터를 영원히 망가트린다.

    세상에 완전히 안전한 핵은 없다. 그것에 기초해서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결국 수백 년 수천 년 쌓아온 우리의 삶이 한방에 처참하게 무너진다. 원전 폭발(2011년 3월) 이후 1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회복의 끝이 보이지 않는 후쿠시마를 보라. 원전 확대는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돼서는 안 된다.

    지자체, 인구 감소하는데 지역개발사업 남발

    성장주의는 지방정부에도 뿌리 깊다. 거의 모든 지자체가 ‘지방소멸’ 대응을 빌미로 각종 개발사업을 벌이고 있다. 각 지자체의 지역발전계획은 인구증가를 목표로 하고 있다. 각 지자체의 계획 인구를 모두 합하면 현재 인구의 1.5배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5명(2022년 상반기)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다(OECD 평균은 1.6명). 대체출산율이 대략 2.1명인 것을 고려하면, 백방으로 노력해도 급속한 인구감소는 피할 수 없다.

    최근 통계청은 우리나라 인구가 5,172만명에서 50년 뒤인 2070년에는 3,765만명으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인구 감소시대에 각 지자체는 오히려 인구를 늘리겠다며 무리한 지역개발사업을 남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어이없게도 서로 인구 뺏어오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소국과민(小國寡民), 즉 될 수 있는 대로 나라의 크기를 작게 하고, 나라의 인구를 적게 하라고 했다. 대신에 백성이 먹는 것을 달게 해주며, 백성이 입는 것을 아름답게 해주며, 백성이 사는 것을 편안하게 해주며, 백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그들의 풍속을 즐겁게 해주라고 했다.

    각 지자체는 인구증가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구감소는 어차피 피할 수 없다. 인간을 노동력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인구감소는 재앙이 아니라,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성장주의와 불평등 극복해야

    기후변화로 인한 각종 재난이 빈발하고 식량위기가 고조되면서 우리 사회에도 기후위기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9.24 기후정의행진’에 무려 3만5,000명이 참여했다. 탄소중립만으로는 기후변화를 막을 수 없다. ‘기후정의행진’은 “화석연료와 생명파괴 체제를 종식해야 한다”, “모든 불평등을 끝내야 한다”, “기후위기 최일선 당사자의 목소리는 더 커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성장의 한계>가 말하듯 지구의 수용능력에 맞추어 성장을 멈추고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사회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성장주의와 불평등을 극복해야 한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사람에게 성장을 멈추고 소비를 줄이라고 할 수 없다. 부자 나라, 부자들이 성장을 멈추고 소비를 줄여야 한다. 지속 가능한 세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소비수준을 증가시키면서도 동시에 인간 전체의 생태발자국을 줄여야 한다.

    그렇지만 “부유층, 기업, 기득권을 위한 이데올로기인 성장주의”(노벨경제학 수상자인 아비지트 배너지)에 맞서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위대한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의 명언처럼 “사려 깊고 헌신적인 시민들로 이루어진 소수가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마라. 세상은 이들에 의해 변화해 왔다.” 더 많은 사람이 자각하고 서로 연대한다면,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을 경제성장으로부터 국민총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 소빈박진도의 가보세 http://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8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