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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농협이 제구실만 해도 농촌 산다.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이사, 박진도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 작성일2020/03/04 18:30
    • 조회 451
    농협이 제구실만 해도 농촌 산다.
    박진도 | 지역재단 상임이사, 박진도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신용-경제 분리 정부안은 못 믿을 약속어음, 새 농협중앙회가 지역농협 개혁 주도해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로 농민들이 크게 동요하고 정부의 무책임한 시장개방 정책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 동시에 농민들은 ‘농협이 제구실만 해도 우리 형편이 이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며 한탄한다. 농민 조합원들의 불만은 한마디로 “조합이 농산물 판매 같은 농민들에게 이익이 되는 경제사업은 등한시하고 조합 수익에 도움이 되는 ‘돈 장사’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농민 앞세워 도시민 상대로 돈장사?

    △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9월 서울 중구 충정로1가 농협중앙회 건물 앞에서 중앙회 출자회사 ‘농협무역’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금지를 촉구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본래 사회적 약자인 농민들이 서로 협동해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조직한 결사체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농업협동조합은 탄생부터 농민조합원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통제돼왔다. 그 때문에 농민조합원들은 주인의 자리에서 배제되고, 농협은 ‘임직원을 위한 조합’ ‘독점자본의 파이프라인’이란 비난을 받아왔다. 1989년 형식적 민주화 조처가 단행됐지만, 여전히 농민들은 조합의 주인 자리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농협의 사업 및 지배구조의 기본 틀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농협은 어떤 모습일까? 농업협동조합법에 따른 농협은 ‘농민의, 농민에 의한, 농민을 위한’ 협동 조직이고, 그 근본은 협동화를 통해 농민조합원의 농작물 생산과 농산물 판매를 도와주는 경제사업이다. 이러한 경제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농민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공급하기 위해 신용사업을 하도록 돼 있다. 우리 농협의 현실은 이러한 법 정신에 어긋난다. 농민을 위한 경제사업은 곁가지에 불과하다. 신용사업이 중심이 되면서, 농민조합원(정조합원)보다 비농민조합원(준조합원)의 수가 훨씬 많아졌고, 농민이 아닌 사람들(비농민 조합원과 비조합원) 중심으로 조합이 운영되고 있다. 지역농협의 구조와 운영이 농민조합원의 이익에 기초하지 않고 있다. 이는 명백한 법 위반이다. 
    지역농협이 법을 위반하고 있다면, 농협중앙회는 아예 법을 무시하고 있다. 현행 농협중앙회의 사업은 지역조합이나 농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일반 시중은행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농업과 농민을 앞세워 도시민을 상대로 ‘돈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경제사업은 적자사업이고, 면피용 환원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경제사업은 회원조합을 위한 연합사업이 아니라, 중앙회 자체 사업을 중심으로 삼는다. 중앙회의 목적이 회원조합의 공동이익 증진이 아니라, 자기 이익의 극대화에 있기 때문에 심지어 회원조합과 잦은 마찰을 일으킨다. 본말이 전도된 정도가 아니라, 근본이 실종됐다. 
    지역조합과 농협중앙회의 구조와 사업이 농민 조합원이나 회원 조합의 이해에 기초하고 있지 않은 것에 우리나라 농협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농협의 지배구조와 사업 체제의 개혁을 통해 농협이 농협법 정신에 맞도록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지역조합은 생산과 판매의 협동화를 통해 농민 조합원의 이익을 증진하고, 중앙회는 자체 사업이 아니라 회원조합의 공동 이익과 발전을 위해 복무하는 구조로 농협조직을 개혁해야 한다. 

    금융 업무는 은행으로 분리해야 

    지난 4월 정부는 현행 농협중앙회를 2017년에 교육·지원 기능의 농협중앙회와 농업경제, 신용경제 등 3개의 별도 법인으로 분리하는 ‘농협중앙회 신용·경제사업 분리 방안’을 확정 발표하고, 이로써 그동안의 신용·경제 분리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정부의 신용·경제 분리 방안은 믿을 수 없는 약속어음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농협중앙회의 경영 정상화 방안일 뿐 농협중앙회 개혁안은 아니다. 정부안은 경제사업 활성화와 적자 해소를 신용·경제 분리의 전제조건으로 달고 있는데, 현재와 같은 신용사업 중심의 농협중앙회 사업구조로는 경제사업의 활성화를 달성하기 어렵다. 그렇게 되면 10년 뒤에도 농협중앙회의 신용·경제 분리는 안 된다. 정부안에 따르면 중앙회의 경제사업 활성화는 신용·경제 분리의 목적이자 선결 조건이라는 모순을 안고 있다. 정부의 농협중앙회 신용·경제 분리안은 중앙회의 집요한 로비와 압력에 굴복해 농협개혁을 실질적으로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우리가 농협중앙회의 신용·경제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농협중앙회 사업의 건전화를 위해서가 아니다. 농협중앙회 사업의 건전화도 중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농협중앙회를 농협법에 있는 대로 회원조합의 공동이익과 발전에 복무하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지금처럼 농협중앙회의 사업이 회원조합이나 농민조합원의 이익에 바탕을 두지 않은 채로 운영된다면, 농협중앙회는 날로 번창하지만, 회원조합과 농민조합원은 날로 쇠퇴하는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없다. 
    농협중앙회 개혁의 핵심은 현행 농협중앙회를 조속히 ‘비사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본래의 중앙회와 ‘사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용사업연합회 및 경제사업연합회로 분리하되 그것들을 협동조합의 큰 틀 내에 두는 것이다. 회원조합이나 농민조합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현행 농협중앙회의 금융 업무는 은행으로 분리해 나름의 금융기관으로 발전하는 길을 걷도록 하되, 다만 협동조합은행에 대한 지배권과 잉여처분권을 회원조합이 갖도록 함으로써 협동조합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한다. 경제사업은 지금과 같은 농협중앙회의 독자사업이 아니라 회원조합의 경제사업을 지원하는 체제로 재편돼야 한다. 비사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농협중앙회는 명실공히 회원조합의 중앙회로서 정부에 대한 농정 활동과 조사·연구, 회원조합에 대한 지도·교육·감독 기능에 전념하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농협중앙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지역농협의 개혁을 주도하는 것이다. 농민들 처지에서 보면, 어떤 의미에서 농협중앙회보다 지역농협의 개혁이 더욱 절실하다. 지역농협이야말로 농민들의 일상적 이해가 관철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역농업 및 농민조합원과 괴리돼 있는 현행 지역조합들을 지역농업의 주체로, 그리고 농민조합원의 이익에 복무하는 진정한 협동조합으로 개혁하지 않으면 우리나라 농업의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 
    같은 조합원이지만 생산하는 농산물이 전혀 다르고, 경영 규모에도 큰 차이가 있고, 소수의 전업농가와 대다수의 영세 고령 농가로 분화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과거 동질적이던 영세 소농들을 대상으로 설립된 현행 종합 농협 체제가 그 모습 그대로 과연 지역농업의 주체로 발전할 수 있을지를 진지하게 재검토하고 지역농협의 재편 방향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이 모든 개혁의 출발점이 농협중앙회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하는 것이다. 

    각 당 대선 후보 핵심 공약으로 

    집권 초기 “농협이 센가 내가 센가 보자”면서 농협개혁의 전의를 불태우던 노무현 정부에서도 농협개혁은 뒷걸음치고 있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통합 농협중앙회의 힘 앞에 모두 무기력하게 백기를 들고 있다. 농협개혁을 추동할 힘은 농민조합원밖에 없다. 전국농민회총연맹과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등 주요 농민단체들이 각각 협동조합 개혁을 농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로 설정해 활동해오고 있는데, 대선 국면을 활용해 농협개혁의 힘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농민단체들은 단체 간의 작은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농협중앙회의 신용·경제 분리를 비롯한 농협개혁 단일안을 만들어 각 당의 대선 후보들이 핵심 공약의 하나로 반드시 채택하도록 압박해야 한다. 

    *한겨례 21 2007년 10월 19일 게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