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TOP

재단칼럼

    농업붕괴, 농민만의 재앙 아니다 | 박진도 지역재단 상임이사, 충남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 작성일2020/03/04 15:29
    • 조회 469
    농업붕괴, 농민만의 재앙 아니다

    “아파트 한 채를 지어도 환경영향평가를 하는데, 한국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면서 그것이 국민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기초적인 분석조차 하지 않고, 제대로 된 의견수렴 절차 한 번 없이 협상을 개시하고, 더욱이 미국 쪽 형편에 맞추어 1년 안에 협상을 끝낸다고 하니,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이며, 제정신이 있는 정부냐?”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상대책위에 참여한 농민대표의 항변이다. 비난의 화살은 필자에게 향한다. “교수님, 얼마 전에 〈그래도 농촌이 희망이다〉라는 책을 냈는데, 정부가 농업이야 망하든 말든, 농민이야 죽든 말든 막무가내로 농산물시장을 개방하고, 국회는 수수방관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희망을 찾으란 말입니까?”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상품무역뿐 아니라 서비스, 투자, 지식재산권, 환경, 노동, 위생 및 검역 등 15개 전후의 포괄적 분야를 협정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국민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농업부문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의 자유무역협상은 상대국의 농업개방을 겨냥한 것”이라는 로버트 포트먼 미국 무역대표의 직설적인 말처럼, 미국이 한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려는 가장 큰 목적은 한국의 농산물시장을 전면 개방하여 미국의 농산물 수출을 늘리려는 것이다.

    2001년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협정이 체결되면 4년 후에 한국의 농업생산액은 쌀을 포함해 8조9000억원 감소할 것이라 했다. 이는 우리나라 농업 총생산액의 약 45%에 이르는 금액으로, 협정을 통해 한국 농업을 초토화시키고 미국의 식량식민지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아무리 미국에 약한 한국 정부라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고, 무슨 수가 있어도 쌀의 관세 철폐만은 피하려 할 것이다. 그런데 설사 미국이 쌀의 관세 철폐를 당장 요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장기간에 걸친 관세 인하를 요구할 것이며, 쌀을 양보한 대신 다른 농산물의 더 많은 시장개방을 요구할 것이다. 미국과의 농산물협상은 매우 어렵게 진행되겠지만, 한국 정부가 스위스 정부처럼 미국의 무리한 농업개방 요구를 거부하여 협상 자체를 결렬시킬 가능성은 매우 낮고, 농업분야를 희생해서라도 협정을 성사시키려 할 것이다. 이는 “농업분야의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입발림 이외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협상을 강행하는 정부의 자세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협상 과정에서 정부가 선방하여 미국 쪽 요구의 절반 수준으로 국내 농업의 피해를 줄인다 해도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게 없다. 예를 들어, 자유무역협정에 의해 농업생산액이 20~30% 줄게 되면, 단기적으로는 우리 농업이 현재의 70~80% 수준에서 유지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한국 농업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농촌 내에 농업 이외에 마땅한 취업기회가 없는 상황에서 지금도 턱없이 부족한 농가소득이 20~30% 줄어든다면 대부분의 농민은 농사를 계속할 수 없어 결국 농촌을 떠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분야로 파급되는 영향은 더 두렵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현재 진행 중인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의제(DDA) 농업협상에서 우리의 협상력을 크게 약화시켜 농업분야의 개도국 지위 유지는 사실상 물건너가게 되고,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협정에서도 농업분야의 대폭 양보가 불가피하다. 농민들의 심리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어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릴 위험이 높다. 오갈 데 없는 고령 농민보다는 농업생산 의욕이 왕성한 젊은 농민일수록 극심한 혼란상을 보일 것이다.

    한국 농업의 붕괴는 농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농업의 붕괴는 농촌사회의 붕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농업의 비중은 국내총생산의 4%, 취업인구의 8%에 지나지 않지만, 시·군 지역에서는 여전히 중심적 기초산업이기 때문에 농업이 붕괴하면 지역경제의 기반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한 농업이 지니는 다원적 기능(국토 및 환경보전, 식량안보, 경관 및 휴양공간의 제공, 전통문화의 계승, 인간교육 등)도 상실되고, 그 직접적 피해는 농민뿐 아니라 일반 국민에까지 미치게 된다. 농촌지역뿐 아니라 중소도시의 몰락을 동반하면서 대도시 인구집중에 따른 교통·환경·주거·실업·교육문제 등 국민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다.

    한국 경제의 빠른 성장의 그늘에는 농업과 농촌, 농민의 희생이 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면서 엉터리 국익론을 앞세워 농업과 농민의 한없는 희생을 강요하는 행위는 반드시 막아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수천 년의 농업역사를 자랑하는 인구 5천만명의 대국이 살벌한 도시국가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성장제일주의를 극복하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지향하는 새로운 공동체 사회로 한 단계 높이 발전할 것인가를 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 한겨레신문 2006년 3월 15일자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