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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체계적인 곡물생산 정책이 아쉽다 | 정영일 지역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0/03/04 18:25
    • 조회 405
    체계적인 곡물생산 정책이 아쉽다
    정영일 | 지역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타결되고 한·유럽연합(EU) FTA 협상이 진행되는 등 거대 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인 FTA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농업에는 패배주의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어려운 때일수록 정부나 농민이 보다 결연한 자세로 험난한 개방의 파고를 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움직임은 너무나 소극적이어서 싸워보기도 전에 싸울 용기를 상실한 모습으로까지 느껴진다. 

    최근 우리 농정에서는 곡물자급률 20%대라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체계적인 생산정책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농림부 올해 업무계획에서는 ▲농식품의 위생·안전성 관리 ▲전업농 육성과 품질 고급화를 통한 농업경쟁력 강화 ▲삶의 질 향상 및 도시민의 농촌유치 등 세가지가 주요 방향이다. 중장기 식량 자급목표 설정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구체적인 정책수단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미 FTA 보완대책(안) 또한 피해보전직불과 폐업지원 등 피해보전장치의 확충과 직불제 등 농가소득대책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 생산 확충을 위한 체계적 대책을 담고 있지는 않다. 최근에는 정부의 최고위 협의기구인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해외 관광골프 수요를 국내로 유도하기 위해 계획관리지역의 농지를 농민이 현물 출자하는 방식의 이른바 ‘반값 골프장’ 건설계획을 내놓아 그 타당성을 둘러싼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는 달리 국제곡물시장에서는 선진국들의 적극적인 바이오에너지 정책의 추진, 세계인구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인도의 엄청난 규모의 곡물수요 확대, 지구온난화 등의 요인이 겹치면서 곡물의 공급부족과 가격급등 추세가 급진전되고 있다. 
    미국 중서부 대평원에서는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에탄올이 대체에너지로 각광받으면서 값 폭등에 따른 작부체계가 면화·콩에서 옥수수로의 전환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편으로는 중국이 2008년부터 사료곡물 순수입국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여 일찍이 레스터 브라운이 경고한 바 있는 ‘중국발(發) 세계 식량파동’의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국제 농산물 가격의 고공행진이 농산물을 원료로 하는 식음료품 가격을 끌어올리는 연쇄구조가 농업발(發) 인플레이션, 즉 ‘애그플레이션(Agflation)’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전망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불리한 농업조건과 농산물시장 개방이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는 여건 아래 세계 곡물시장의 변화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 사료를 포함한 곡물수급 안정에 농정의 최우선 순위가 설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곡물수급의 안정화를 위한 정책 노력을 위해서는 국내생산의 유지·확충뿐 아니라 수입선의 안정적 확보와 효율적인 비축제도의 운영 등 다양한 정책수단을 균형있게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 곡물시장의 불안정성이 급격히 높아가는 최근의 추세 아래서 국내생산 확대정책은 다른 정책수단에 우선하는 기초적 과제로 설정되고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여기에는 쌀·콩 등 기초식량과 사료곡물을 포함한 작부체계의 합리화가 핵심과제가 될 것이다. 국내 가용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곡물수급 안정화를 위한 획기적 정책 노력에 정책당국과 관련주체들이 모든 역량을 결집할 것을 기대한다. 

    *이글은 2007년 9월 7일 농민신문에 등재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