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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다시 생각나는 다산의 3농 사상과 농책(農策) |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전 농림부장관 
    • 작성일2020/03/05 16:28
    • 조회 612
    다시 생각나는 다산의 3농 사상과 농책(農策)
    | 김성훈 중앙대 명예교수·전 농림부장관 

    다시 생각나는 다산의 3농 사상과 농책(農策)
    -정약용 선생 별세 178주기를 맞아-


    요즘 정부 안팎이 규제개혁 논의로 시끌벅적하다. 대통령이 장장 7시간이나 기업대표들이 참석한 공식 규제개혁 회의를 주재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엔 정작 규제의 대다수 피해자인 서민, 중소상공인, 농민, 노동자 대표들이 보이지 않았다. 규제개혁의 주된 목표가 기업, 성장, 수출, 일자리이기 때문인가 보다. 국가 기강을 뒤흔들고 있는 민생, 민권, 민주 문제는 1차적 개혁대상에서 빠진 모양이다. 비정상(非正常)의 온상인 국정원과 금감원, 농협의 개혁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은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개혁의 역사를 새삼 뒤돌아보게 된다. 5백년 조선왕조 기간 대표적인 개혁가를 들라하면 삼봉 정도전(三峯 鄭道傳),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을 손꼽는다. 모두 백성의 안위를 염두에 두고 민초들의 입장에서 민생 민권 민주를 위한 개혁론을 펼쳤고 그중에서 다산은 농업 농민 편에서 농정개혁론을 가장 많이 펼쳤다. 다산 정약용은 33세(1794) 때 일찍이 경기도 암행어사로 임명되어 몇 개 고을을 암암리에 순찰하고 탐관오리들을 탄핵했다. 이 순찰 길에서 그는 농지(土地)와 환곡(還穀)과 군포(軍布), 즉 삼정(三政)의 문란을 둘러싼 관료들과 토호세력들의 착취에 의한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전 생애를 일관하는 민중 지향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된 듯하다.

    삼정의 문란과 다산의 삼농 사상

    일찍이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임금께 드리는 ‘농책(農策)에서 “대저 농이란 천하의 가장 큰 근본으로서 때(天時)와 땅(地利)과 사람(人和)의 화합을 기해야 그 힘이 온전하게 되고, 심고 기르는 것이 왕성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낳는 것은 하늘이고, 기르는 것은 땅이며, 키우는 것은 사람이다. 이 삼재(三才)의 도(道)가 하나로 모인 다음에야 농사일과 나랏일에 모자람이 없게 된다. …그런데 천하 사람이 차츰 (나랏일의) 근본(本)을 버리고 끝(末)만 도모하니 기름진 논밭과 살찐 흙이 두루 묵히게 되고, 높은 모자, 좋은 옷을 입은 놀고먹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 농사일의 고통스러움을 근심하지 않고서 어찌 왕업의 터전이 굳건하길 바랄 수 있으며, 농민의 고달픔을 어루만지지 못하면서 어찌 모든 백성의 평안함을 기대할 것인가? 차라리 대막대기를 끌며 바다를 건너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라고 크게 한탄하였다.
    불행하게도 다산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입으로만 개화를 부르짖던 구한말의 조정은 계속된 서정(庶政)과 농정의 실패에 겹쳐 외세의 강압으로 강제 개항을 당하고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내정 개혁과 외세의 발호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민생은 더욱 도탄에 빠지고 마침내 동학농민혁명과 을사보호늑약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이 땅의 뭇 선남선녀들이 대도시로, 만주대륙으로, 하와이로 한 많은 유랑 길에 나서게 된 것은 이미 다산 선생이 일찍이 예언한 대로이다.

    ‘경자유전’ 골자 토지개혁론 주창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미리 막기 위해 다산은 지주제도의 폐해를 혁파하는 토지개혁론(田論) 부터 주창한다. ‘경자유전(耕者有田)’과 ‘공동경영’의 원칙에 입각한 여전법(閭田法)이 그것이다. 농민이 농민으로 존재하려면 농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확고히 하고 공동경영(협동)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였다. 농민을 농지의 주인으로 삼는 입민지본(立民之本)은 오로지 농지의 재분배를 통해서 세울 수 있다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주장을 펴는 등 다산의 농업관은 대단히 원칙적이면서도 오늘날에도 그 시사성과 실천성이 뛰어나다.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에도 이 ‘경자유전’의 원칙이 조문화되어 있는데 실상은 그때나 마찬가지로 있는 자들의 불법 소유가 만연하다.
    다산의 “농업이란 하늘(天時)과 땅(地利)과 사람(人和)이라는 3재(三才)가 어울려 농업의 도(道)를 일군다”는 사상 역시 오늘날 현대경제학 용어로 말하면 친환경적 친자연적 농업관을 피력한 것이다. 특히 농업은 태생적으로 세 가지 불리점이 있는 바,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다음과 같은 3농(三農)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첫째는, 대저 농사란 장사보다 이익이 적으니, 정부가 각종정책을 베풀어 “수지맞는 농사(厚農)”가 되도록 해주어야 하며, 그 둘째는, 농업이란 원래 공업에 비하여 농사짓기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우니, 경지정리, 관개수리, 협동화를 통하여 농사를 편히 지을 수(便農)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며, 그 셋째는, 일반적으로 농민의 지위가 선비보다 낮고 사회적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함에 비추어 농민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上農)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만일 나라가 농업·농민을 이처럼 우대하지 않으면 바다를 건너 막대기를 벗 삼아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토로할 만큼 농업·농촌문제를 나라와 겨레 발전의 필수기본조건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관료와 토착세력들의 수탈을 고발한 “애절양(哀絶陽)”이나 “기민시(飢民詩)”와 같은 수많은 시문을 통해 사회정의 확립과 민생의 바른 길을 깨우쳐 준 것도 그 일환으로 보인다.

    현대적 상업관과 개혁사상 전파

    다산은 또한 상업을 발전시켜 생산과 부를 늘리되, 특권을 갖는 상업이라든지 매점매석은 억제하고 생산자와 소상인은 보호해야 한다는 현대적 상업관을 주창하였다. 즉 정부는 도매상인들의 과도한 독점권(禁亂廛權) 행사를 일정하게 제한하는 통공(通共)정책을 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오늘날 대형 다국적 유통회사들의 횡포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 외에도 그가 주장하고 일부 실천한 바 있는 과학기술개발론, 우두(천연두) 퇴치법이라든지 광산국영론, 조세 및 화폐제도 개선론 등은 지금도 가히 경청해야 할 탁견이라 할 만큼 당시의 사회경제 여건에 비추어 아주 빼어나다.
    다산의 개혁사상은 경제부문 이외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예를 들어 오늘날의 고등(행정, 사법)고시, 즉 과거제도의 폐지, 중화사상의 거부와 민족주체의식의 강조, 공평하고 공정한 인재 등용 등을 주장했다. 이 중에서도 양반이 되면 군포도 안내고 이른바 놀고먹을 수 있는 썩은 제도, 문벌주의, 지방차별, 적자와 서자의 차별, 당파 차별 등 각종 차별정책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뭐니 해도, 다산이 되풀이하여 강조한 분야는 현대적 의미의 부정부패 비리척결론이다.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횡포를 척결하지 않고는 나라의 미래도, 백성들의 편안함도, 부국강병도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부단히 그 대안을 찾아 개혁정책의 전파에 노심초사한 것이다.

    영원히 살아 숨 쉴 다산의 정신

    다산이 강진에 귀양 온지 17년째 되던 해 불후의 명저인 「경세유표」를 끝내고 그 이듬해(1818년) 「목민심서」를 마무리(8월)하자, 하늘이 기다렸다는 듯 18년 귀양살이가 풀린다. 18년전 귀양 올 때 형(약전)과 함께 걸었던 길을 터벅터벅 홀로 걸어 고향집으로 향한다. 돌아가는 걸음마다 눈물자국이 서리고 차마 혼자 길을 재촉할 수 없었다. 2주 걸려 마현 두물머리집에 도착하였으나 노처와 아이들의 얼굴빛이 굶주림에 처량하다. 그런데도 귀양길을 떠날 때 기록해 두었던 재산목록과 비교하여 더 불어난 재산은 주변 친지들에게 나누어준다. 다산은 여생을 주로 고향집에 칩거하며 우리나라 제례(祭禮) 모음 책인 ‘흠흠신서’를 완성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먼저 떠난 옛 친구와 지인들의 묘지명 지어주기, 산수 유람하기 등으로 자유인이 되어 벌 나비 따라 청산을 오르고 냇물은 건너며 다음 세상을 조용히 준비한다.
    그리하여 부인 홍씨(洪氏)와의 결혼 60주년이 되는 회혼일(回婚日) 아침, 1836년 음력 2월22일 진시(辰時, 아침 7-9시), 다산 정약용 선생은 능내리 자택에서 고요히 눈(正寢)을 감았다. 다산이 이승을 하직하는 날 마지막 남긴 그의 회혼시(回婚詩)는 지금도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60년 세월, 눈 깜짝할 사이 날아갔으나/복사꽃 무성한 봄빛은 신혼 때와 같구려./살아 이별, 죽어 이별에, 사람은 늙었지만/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유언에 따라 두 분은 지금 마재 여유당(與猶堂: 겨울 시내의 살얼음판을 건너듯 조심하고 삼간다는 뜻) 뒤 언덕의 한 무덤에 나란히 누워 계신다. 마지막 남긴 시는 너무나 아름답다. 님은 갔어도, 님의 정신과 사상은 영원히 살아있다. 지금도 우리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앞으로도 다산의 정신과 사상은 오고 또 올 후손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이 글은 2014년3월26일 농어민신문에 실린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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