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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위기를 기회로 정영일 | 지역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 작성일2020/03/04 18:15
    • 조회 460
    위기를 기회로
    정영일 | 지역재단 이사장, 서울대 명예교수


    1년 2개월에 걸친 ‘총성 없는 전투’ 끝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이제 공은 두나라 의회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다양한 견해 때문에 비준동의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한·미 FTA는 우리나라가 거대 경제권과 추진하는 최초의 양자협상이다. 또한 미국이 세계경제에서 지닌 엄청난 영향력에다 상품 무역과 서비스 이외에 광범위한 경제 제도를 포함한 19개 협상 분야를 포함한 일괄타결 방식의 협상이어서 그 결과의 섣부른 평가는 자칫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오류를 초래할 우려가 크다.

    이번 협상에서 최대의 수혜 부문으로 꼽히는 자동차·섬유 등과는 반대로 농업 부문은 처음부터 적지 않은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 바 있다. 협상 결과도 쌀을 제외한 미국 측 관심 농산물의 관세가 즉시철폐 또는 최장 10~20년의 단계적 철폐로 합의되었다. 쇠고기·돼지고기·오렌지·포도 등 주요 품목에 대해서는 이행기간 설정, 계절관세, SG(세이프가드)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충격을 완화하는 성과를 얻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완전개방 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숨막히는 주고 받기식 협상이 끝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하루빨리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아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신중하게 분석하고 가장 바람직한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데 모든 지혜를 모아나가야 할 것이다. 지금 농업계가 빠져 있는 지나친 분노와 좌절감이나 일반 경제계에 퍼져 있는 얄팍한 성취감과 낙관론을 넘어 ‘양날’을 지닌 한·미 FTA 협상 결과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살려내기 위한 대승적 노력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투자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식의 천박한 이해와 ‘한·미 FTA는 한국농업의 무장해제’라는 과장된 주장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찾기 위한 성숙된 논의의 장이 아쉽다. 이제 농업·농촌 문제가 정부와 농민의 역량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으며, 도시 소비자와 납세자를 포함한 전 국민의 관심과 지원 없이 현대사회의 농업·농촌이 유지되기 어려운 것은 전 세계 선진국들의 공통된 현실이다. 

    다음으로 정부가 성난 농심을 달래기 위해 내놓은 국내 보완대책도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콘텐츠를 담아야 한다. 협상 타결 직후 정부당국이 발표한 대책은 현행 119조 투융자사업 규모를 확대한 ‘혁명적 대책’을 통한 피해 품목의 소득보전직불과 희망농가의 폐업지원금 지급 등 한·칠레 FTA의 국내 보완대책을 되풀이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어 또 한차례의 국면 전환을 위한 대책을 보는 느낌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5년 후 또는 10년 후의 한국농업과 농촌의 모습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조만간 DDA(도하개발아젠다)의 다자간 협상이 다시 속도를 낼 것이고, 2015년이면 한국쌀의 관세화가 예정돼 있다. 또 EU(유럽연합)·중국 등 다른 거대 경제권과의 FTA 협상도 가시화될 것이다. UR(우루과이라운드)에서 시작된 농업 개방의 파고는 한·미 FTA를 통해 가속화되고 DDA를 거쳐 한·EU 또는 한·중 FTA를 통해 마무리되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변해야 할까? 그 답은 지난 15년 동안의 재정 투입과 정책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과 성찰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년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