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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칼럼

    흑운암류우일촌 (黑雲暗柳又一村) | 김성훈 중앙대 명예 교수, 전 농림부장관 
    • 작성일2020/03/05 11:34
    • 조회 413
    흑운암류우일촌 (黑雲暗柳又一村)
    | 김성훈 중앙대 명예 교수, 전 농림부장관 


    며칠 후면 호랑이 해(庚寅年)가 가고 토끼 해(辛卯年)를 맞이한다. 올해는 우리 농업인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난 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발생한 구제역으로 경기도 포천에서 6000여 마리가 살처분 됐는데 다시 연말 엄동설한에 안동에서 시작해 경북, 경기, 강원도까지 휩쓸고 지나간 구제역으로 역대 최대인 30만여 마리의 소, 돼지를 땅에 묻어야 했다. 특히 청정지역이며 한우 본고장이나 다름없는 강원도마저 뚫린 것은 충격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한·EU, 한·미 FTA 앞에 풍전등화 같던 우리나라 축산업의 씨가 마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 되고 있다.
    연초부터 우려되었던 것은 축산농업만이 아니다. 의무적으로 수입해 들어 온 외미가 창고마다 천정부지로 쌓이고 쌀 소비마저 둔화돼 일찍부터 쌀 대란(大亂)이 예고됐었다.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는 북녘 동포들에게 해마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입해 들어오는 수입량만큼 이라도 장기 차관방식으로 공여해 쌀 대란만은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드셌으나 정부당국은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추수기를 앞두고 가마당 쌀값은 10여년 전의 13만원대로 폭락해 계속 내리막길을 치달았다. 참다못한 하늘이 막판 추수기에 비바람을 쏟아낸 덕분에 다행히(?) 수확량이 13%나 줄어 쌀값을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게 해주었다.

    구제역 등 바람잘 날 없던 한해

    그러나 하늘은 공평하였다. 9월 비 폭탄으로 쌀 농민들의 애환은 달래주었지만 산간고랭지 배추농사는 엉망이 되었다. 도시민들은 1만4000원을 주고도 배추 한포기를 제대로 사 먹을 수 없었다. 대통령 식탁에 오르는 양배추 가격마저 8000원까지 치솟았다. 이에 정부는 긴급대책이랍시고 중국산 배추 무관세 수입을 정책으로 내놓았다. 그러다 보니 막상 김장용 배추가 출하되는 11~12월의 배추값은 폭락 조짐을 보였다. 이를 애달파 하는 남녘 농민들의 탄식이 깊어갔다. 다시 하늘은 천애고아 같은 무 배추 농민들을 긍휼히 여겨 때 아닌 한파로 그 생산량을 15% 가량 줄여 주었다. 
    이 와중에 천안함에 이어 연평도 사태가 발생하였고 미국은 사상 최초로 조지 워싱턴 항공모함을 서해로 보내 그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 대가는 아니겠지만, 우리 정부는 경황(驚惶) 중에도 통상교섭본부장을 미국에 보내 미국 정부가 원하는 대로 한·미 FTA 추가 재협상을 해주고 돌아왔다. 돼지고기 냉동목살의 무관세 수입연도를 2년 더 얻어냈다며 실제론 2006년 타결한 한·미 FTA 때 보다 더 양보해 놓고 돌아와 국익의 균형이니 뭐니 낯간지러운 사설(邪說)을 늘어놨다.
    그런 말씀을 한 분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 정부의 녹(祿, 세금으로 걷은 봉급)을 받는 장관급 통상교섭본부장이시다. 2006년 FTA 때엔 이미 2004년 내어준 2014년부터의 쌀 수입개방 약속 사실에 짐짓 눈을 감고 자못 FTA에서 쌀 수입개방만은 막아낸 것인 양 허풍을 떨었다. 또 그 분은 2008년 6월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위생조건 재협상 땐 30개월령 등 소 연령표시를 정부 수출보증(EV)제도 대신 수출도축업자 민간자율표시의 품질체계평가(QSA)라는 구속력 없는 생소한 제도를 받아온 장본인이다. 사실이 들통 나자, 느닷없이 미국의 QSA가 우리나라 정부가 보증하는 품(品)자 친환경농산물 표시제와 다름없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쌀 대란·배추값 폭등에 실언까지

    그 분이 이번에는 진짜 큰 실언을 했다. 지난 13일 한미 FTA 추가 재협정을 토론하는 한 세미나에서 “다방 농민의…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문제이다. 정부가 투자했더니 엉뚱한 데로 가더라”며 농민들이 보조금을 헛되이 썼다고 부도덕함을 탓했다. “이제 우리(정부)가 할 수 있는 한계에 오지 않았냐는 게 저의 솔직한 고백이다”, “농업문제를 개혁으로 할 것인지 보호로 할 것인지 국민들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단계”라고 말했다. 수년동안 허풍조의 대국민 거짓말에 한껏 기고만장한 끝에 잘못 내뱉은 실언인 것 같다.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했음은 물론이다. 농민단체들은 추운 날씨인데도 시청광장에 모여 본부장의 망언을 규탄하며 사퇴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진짜 ‘다방 농민’이야말로 그동안 수백억원의 저리 또는 무이자 자금을 정부로부터 얻어 내어 치부하여 마치 성공한 농업 CEO인양 행세한 이 정부 초기 ooo 같은 사람 말고 누가 있느냐”고 항의 시위 하였다. 

    불행 떨치고 새해엔 ‘환골탈태’

    이런 일들이 구제역이 극성을 부리고 있는 연말에 일어난 우리나라 관가의 풍경들이다. 올해 일어 난 모든 불행을 국민의 가슴속이 아니라 꽁꽁 언 땅 속에 비명에 간 축령(畜靈)들과 함께 파묻어 버리고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국민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포연이 자욱한 동서해안의 검은 구름과 남북한 간의 전쟁 위험을 바라보며 하느님과 부처님과 삼신할미께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 편안함(國泰民安)을 빌고 빈다. 지난날의 불길한 현상들이 망징패조(亡徵敗兆)가 아니고 오로지 새해 새 아침엔 환골탈태해 거듭나기를 바라고 바랄 뿐이다.
    국난을 맞아 우리 선인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산 첩첩 물 겹겹 길 없는가 여겼더니(山疊水重疑無路), 검은 구름 뿌연 버드나무숲 사이 또 한 길(마을)이 있는 것을(黑雲暗柳又一村)”. 

    * 이 글은 한국농어민신문 2010년 2300호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