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인터뷰4. 멀티플레이어 김동현 농부
- 작성일2017/01/01 13:15
- 조회 684
청년인터뷰4. 멀티플레이어 김동현 농부
멀티플레이어 김동현 농부(30)
안녕하세요. 충북 보은에서 사과농장을 운영하는 농부 김동현입니다. 2014년부터 농사를 시작해 이제 막 4년 차에 접어든 초보 농부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부모님께서 30년째 일구어 오시던 농장으로, 축산과 가공, 농가 숙박과 체험을 겸하는 복합영농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부를 축소하여 과수에 집중하고 있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과수원이죠.
그 안에서 제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물을 심고 잘 관리하고 수확하는 일은 기본이고 농기계 관리, 작물 보호에 대한 지식과 직접 만들어 쓰는 친환경 자재의 원리와 제조기술 등을 익히고 있습니다. 농산물 직거래를 위해 웹페이지 관리, 포장, 디자인, 물류와 같은 유통부문의 일도 겸하고 있고요. 고객 관리는 물론이고 여기에 체험에 필요한 행사의 기획과 운영, 소비자와의 소통도 제 몫이네요.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도 되어야 하고, 농가 숙박까지 하려니 건물 관리도 하고 있네요.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농부’가 하는 일이라기엔 조금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리틀파머프로젝트, 꽃나들이-여름캠프-가을수확 3개 교류행사로 운영되며 가족단위 참가자가 한 해 동안 사과나무를 분양받아
내 사과나무의 소식을 받아보고 가을에 수확 해 가는 체험프로그램>
농촌이 싫었던 아이
사실 저는 농업과 농촌을 참 미워했습니다. 내 가족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농업인들이 도시 근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들게 사시는 걸 보고 자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읍내가 먼 탓에 학원이나 독서실을 다닐 환경이 아니었던 저는, 농장 가공시설 한쪽 방에 공부방을 마련했습니다. 이렇다 할 성적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수능을 준비하던 어느 날 새벽 2시, 부모님께서 일을 하러 가공실로 오셨습니다. 낮 시간 내내 고된 농사일을 하시고, 밤이 되어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나 부모님께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순간이었죠.
성장기에 그날이 두고두고 기억 속에 자리 잡아 ‘절대로 농촌에는 살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고 훗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열에 아홉은 농촌이 싫어 벗어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다 같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청년들이 있어야 농촌이 살아나죠
그렇게도 싫어하던 농업과 농촌을 처음으로 내 인생에 끼워 넣게 된 계기는 군대에서였습니다. 휴가를 나온 어느 날, 모 잡지에 실린 부모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후계에 대한 계획을 묻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부모님은 ‘필요하다’라고만 답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농업과 농촌이 싫었던 저는 아마 이때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농촌을 지키고 있는 이분들이 연로해지면, 이 땅 위에는 뭐가 남지?’. 농촌에 대한 막연한 미움이 걱정으로 바뀌었고 전공을 공과대에서 농업경제학으로 바꾸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사람이 이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을 정도로, 놀기라면 1등이었던 제가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농업 관련 행사에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다녔습니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연수를 다니기도 했고요. 그동안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낯설었지만 생각해보면 이때만큼 즐거웠던 적도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농촌의 미래가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회와 희망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농촌을 그렇게 미워하던 이가 농부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고 있네요.
농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귀농과 귀촌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접근은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는 있지만 수년 이내에 현재의 고령화 문제를 되풀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본적으로 농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고, 청년들의 유입이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이 농업과 농촌을 고민하며 스스로 내린 결론이에요. 농촌 생활을 시작하며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나라는 사람으로 인해 농촌에 청년들이 많이 유입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어요. 효과는 미약하겠지만 나부터 실천하자고 생각했기에 농촌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농민이어도, 후계농은 힘들다...
농사는 강인함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가 가장 큰 진입장벽이 아니냐고 묻는데, 사실 그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드넓은 일터에서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야 하는 일이기에 찾아오는 부담감, 소속감의 부재로부터 오는 외로움, 너무나 많은 변수(농촌 사회와의 관계, 기상변화 등)로부터 오는 불안감 등이요. 처음 시작하는 일인 만큼 닥치게 되는 어려움이 너무나도 많은데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모님께서 농장을 운영해오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부모님이 농장을 하시잖아”. 이건 사실 농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양날의 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설이나 경력 등 기반을 갖추고 있으니 여러 가지 면에서 리스크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커다란 장점이지만, 기존의 방식에서 무언가를 하나 바꾸기가 참 어렵다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수천 가지 품목 중에 재배하는 작물조차 내 손으로 고르지 못하는 경직성도 존재해요. 제가 고민할 기회조차 없이 당연스럽게 사과 농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처음 시작하는 일인지라 모든 일에 서툴렀고, 몸도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작업 속도가 어른들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재배기술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죠. 이미 갖춰져 있는 틀 안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그 안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하다 보니 원래 있던 틀에 하나둘 색깔이 입혀지게 되었습니다. 소비자와 소통을 하고 농산물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게 되었죠. 체험행사에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도입되어 참가하는 가족들이 조금 더 만족했고, 택배 운송장 작성과 같은 잡무를 전산과 연계, 작업 동선과 공정을 개선하는 등 작업환경을 손보게 됐죠. 같은 농부지만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다는 걸 느끼게 된 후로부터는 몸도 마음도 조금 유연해지게 되었죠. 농사일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임(생산자 단체, 교육, 지역 청년모임 등)에 참석해서 재배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유용한 정보도 자연스레 나누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농사를 지으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소속감도 생겼고요. 이 두 가지가 농촌에서 청년이 느끼는 어려움을 가장 손쉽게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블로그를 통해 직거래를 하고 농원의 소식과 사과와 관련된 팁을 소개하고 있다.>
농장에 찾아온 위기, 소비자와 함께 극복!
저는 평소 특이한 발상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소 중요도가 떨어지는 농작업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존재하고 그 사람들에게 일정량의 출하량이 보장된다면 농부는 과감하게 이 작업을 하지 않고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인건비 절약은 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소비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또는 바쁜 농번기에 농사일을 소비자가 도와줄 수 있다면, 농부는 일손을 공급받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임금 대신 농산물을 제공할 수도 있겠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이 더 합리적인 소비문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이런 생각들을 대안농업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분명히 좋은 변화라고 느끼게 해준 기회가 있었습니다.
2015년 가을, 갑작스러운 기후변화에 수확기를 예상보다 빨리 맞이한 사과가 있었습니다.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고 자칫하면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칠뻔한 상황에 놓였는데 평소 이런 상황을 상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농장에서 운영하던 리틀파머프로젝트(사과나무 분양사업) 참가 가족에게 문자로 SOS를 청했습니다. “여러분! 농장에 미니사과가 생각보다 빨리 익었어요. 급하게 수확을 해야 하는데 많은 손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라고.
급하게 기획된 다음날 일손 돕기에 참가해준 가족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하루 만에 필요한 수확량을 모두 채울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농장에서 준비한 약간의 음식과 각자 가져온 먹거리들로 작은 디너파티를 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그날 포장까지 해 선물로 드렸죠. 애타는 농부의 마음에 응해주신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뻤습니다.
그 해 수확한 미니사과는 소비자들에게 역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서로의 필요(농부에겐 일손이, 소비자에겐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이)가 이런 방식으로도 충족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소비자가 농사일을 도와준다는 것, 농부가 남에게 농산물을 맡긴다는 건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던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고마웠고, 의외의 경험에서 농사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네요.
<소비자와 가까워 지기위해 농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전하고 있다.>
농부라서 누릴 수 있는 행복들
제가 농부로 살아가며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에게 물었습니다. “14세의 당신과 만난다면,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배우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라. 다 할 수 있다”.
저 또한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품 안에 지니고 있었더니, 비록 깊이는 얕을지 모르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아름아름 다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작물을 돌보고 가꾸고, 이런 멋진 과정들을 소비자들과 나누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합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배포해서 소비자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다른 분야의 제품을 벤치마킹 해 우리 농장만의 포장과 전단을 만들고, 제품이 되어 실물로 나왔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도 느낍니다.
또 다른 기쁨은 도시근로자보다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유로운 전원생활까지는 아니지만 일과 휴식을 유연하게 배분할 수 있는 점이 좋아요. 본업을 잠시 내려놓고 몇 주간 다른 나라로 배낭여행을 가거나,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일에 완전히 몰두하는 일도 가능하죠. 이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멋진 기회라 생각해요.
농업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feat.동현)
몇 년 전, 제 블로그에 이제 막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고 글을 남겼던 낯선 청년이 생각나네요. 그 친구가 어느새 전라남도 제일의 청년 농부가 되어 이제는 농사짓는 시간보다 강연에 불려 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제주도에 감귤농장을 두고 있는 서울에 젊은 사장님이 계세요. 감귤로 만든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시고 클래스를 열어 강좌를 운영하기도 하세요. 화천에 한 농부는 남편분이 가수에요. 자칭 개미와 베짱이라며 열심히 즐거운 농촌 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있어요. 조금만 가까이 보면, 농촌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 한 다양한 모습들이 있어요.
전문지식을 갖추고 농부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있고, 농부로써 누군가를 가르칠 수도 있어요. 누군가 생산한 좋은 농산물을 더 가치 있게 포장할 수도 있고, 외면 받는 농산물을 효자상품으로 변신시킬 수도 있죠. 농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기획할 수도 있고, 농촌에 수만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예술 활동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진학이나 취업, 혹은 직업을 바꾸길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 농업과 농촌이 없다면 한 번 끼워 넣어 보세요. 흐릿하고 막연했던 미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들로 인해 뚜렷해질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사과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하려고 해요. 농부 본연의 일인 재배에 힘을 좀 더 쓰며 정착을 할까 합니다. 이미 농촌에 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비록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도 수 천 번씩 도시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청년이 살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여기에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생긴 후부터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전히 없어진 것 같아요. 또 언젠가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되네요. 이렇게나 매력적인 농업과 농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저에게 ‘여긴 꽤 괜찮은 곳이야’라고 이야기해줄 것 같아서요.
파란농원에 놀러오세요:)
김동현 블로그 : http://blog.naver.com/pafam_
멀티플레이어 김동현 농부(30)
안녕하세요. 충북 보은에서 사과농장을 운영하는 농부 김동현입니다. 2014년부터 농사를 시작해 이제 막 4년 차에 접어든 초보 농부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이곳은 부모님께서 30년째 일구어 오시던 농장으로, 축산과 가공, 농가 숙박과 체험을 겸하는 복합영농을 해왔습니다. 최근에는 일부를 축소하여 과수에 집중하고 있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과수원이죠.
그 안에서 제가 하는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물을 심고 잘 관리하고 수확하는 일은 기본이고 농기계 관리, 작물 보호에 대한 지식과 직접 만들어 쓰는 친환경 자재의 원리와 제조기술 등을 익히고 있습니다. 농산물 직거래를 위해 웹페이지 관리, 포장, 디자인, 물류와 같은 유통부문의 일도 겸하고 있고요. 고객 관리는 물론이고 여기에 체험에 필요한 행사의 기획과 운영, 소비자와의 소통도 제 몫이네요.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도 되어야 하고, 농가 숙박까지 하려니 건물 관리도 하고 있네요.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농부’가 하는 일이라기엔 조금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리틀파머프로젝트, 꽃나들이-여름캠프-가을수확 3개 교류행사로 운영되며 가족단위 참가자가 한 해 동안 사과나무를 분양받아
내 사과나무의 소식을 받아보고 가을에 수확 해 가는 체험프로그램>
농촌이 싫었던 아이
사실 저는 농업과 농촌을 참 미워했습니다. 내 가족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농업인들이 도시 근로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힘들게 사시는 걸 보고 자랐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읍내가 먼 탓에 학원이나 독서실을 다닐 환경이 아니었던 저는, 농장 가공시설 한쪽 방에 공부방을 마련했습니다. 이렇다 할 성적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수능을 준비하던 어느 날 새벽 2시, 부모님께서 일을 하러 가공실로 오셨습니다. 낮 시간 내내 고된 농사일을 하시고, 밤이 되어서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습에 화가 나 부모님께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끄러운 순간이었죠.
성장기에 그날이 두고두고 기억 속에 자리 잡아 ‘절대로 농촌에는 살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고 훗날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어보면, 열에 아홉은 농촌이 싫어 벗어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다 같은 마음이었나 봅니다.
청년들이 있어야 농촌이 살아나죠
그렇게도 싫어하던 농업과 농촌을 처음으로 내 인생에 끼워 넣게 된 계기는 군대에서였습니다. 휴가를 나온 어느 날, 모 잡지에 실린 부모님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후계에 대한 계획을 묻는 기자의 마지막 질문에 부모님은 ‘필요하다’라고만 답했을 뿐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농업과 농촌이 싫었던 저는 아마 이때 처음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농촌을 지키고 있는 이분들이 연로해지면, 이 땅 위에는 뭐가 남지?’. 농촌에 대한 막연한 미움이 걱정으로 바뀌었고 전공을 공과대에서 농업경제학으로 바꾸었습니다. 놀라운 점은 사람이 이렇게도 바뀌는구나 싶을 정도로, 놀기라면 1등이었던 제가 장학금으로 학비를 충당하고 농업 관련 행사에 하루가 멀다 하고 쫓아다녔습니다. 국내외 가리지 않고 연수를 다니기도 했고요. 그동안과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낯설었지만 생각해보면 이때만큼 즐거웠던 적도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농촌의 미래가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알아가면서도, 한편으로는 기회와 희망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농촌을 그렇게 미워하던 이가 농부라는 이름을 달고 살아가고 있네요.
농촌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귀농과 귀촌으로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접근은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는 있지만 수년 이내에 현재의 고령화 문제를 되풀이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본적으로 농촌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이 바뀌고, 청년들의 유입이 받쳐주어야 한다는 것이 농업과 농촌을 고민하며 스스로 내린 결론이에요. 농촌 생활을 시작하며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나라는 사람으로 인해 농촌에 청년들이 많이 유입되도록 하자는 것이었어요. 효과는 미약하겠지만 나부터 실천하자고 생각했기에 농촌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부모님이 농민이어도, 후계농은 힘들다...
농사는 강인함이 필요한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육체적인 노동의 강도가 가장 큰 진입장벽이 아니냐고 묻는데, 사실 그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드넓은 일터에서 나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해내야 하는 일이기에 찾아오는 부담감, 소속감의 부재로부터 오는 외로움, 너무나 많은 변수(농촌 사회와의 관계, 기상변화 등)로부터 오는 불안감 등이요. 처음 시작하는 일인 만큼 닥치게 되는 어려움이 너무나도 많은데 함께 고민하고 해결할 누군가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부모님께서 농장을 운영해오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부모님이 농장을 하시잖아”. 이건 사실 농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양날의 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시설이나 경력 등 기반을 갖추고 있으니 여러 가지 면에서 리스크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커다란 장점이지만, 기존의 방식에서 무언가를 하나 바꾸기가 참 어렵다는 단점도 존재합니다. 심지어 수천 가지 품목 중에 재배하는 작물조차 내 손으로 고르지 못하는 경직성도 존재해요. 제가 고민할 기회조차 없이 당연스럽게 사과 농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처음 시작하는 일인지라 모든 일에 서툴렀고, 몸도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작업 속도가 어른들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고, 재배기술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죠. 이미 갖춰져 있는 틀 안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그 안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나하나 하다 보니 원래 있던 틀에 하나둘 색깔이 입혀지게 되었습니다. 소비자와 소통을 하고 농산물을 인터넷으로 판매하게 되었죠. 체험행사에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도입되어 참가하는 가족들이 조금 더 만족했고, 택배 운송장 작성과 같은 잡무를 전산과 연계, 작업 동선과 공정을 개선하는 등 작업환경을 손보게 됐죠. 같은 농부지만 각자의 역할이 따로 있다는 걸 느끼게 된 후로부터는 몸도 마음도 조금 유연해지게 되었죠. 농사일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임(생산자 단체, 교육, 지역 청년모임 등)에 참석해서 재배기술을 배우기도 하고, 유용한 정보도 자연스레 나누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같은 농사를 지으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큰 위안을 얻었습니다. 소속감도 생겼고요. 이 두 가지가 농촌에서 청년이 느끼는 어려움을 가장 손쉽게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블로그를 통해 직거래를 하고 농원의 소식과 사과와 관련된 팁을 소개하고 있다.>
농장에 찾아온 위기, 소비자와 함께 극복!
저는 평소 특이한 발상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다소 중요도가 떨어지는 농작업이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소비자가 존재하고 그 사람들에게 일정량의 출하량이 보장된다면 농부는 과감하게 이 작업을 하지 않고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습니다. 인건비 절약은 가격에 영향을 미치고 소비자는 더 저렴한 가격에 농산물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또는 바쁜 농번기에 농사일을 소비자가 도와줄 수 있다면, 농부는 일손을 공급받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임금 대신 농산물을 제공할 수도 있겠죠.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생각이 더 합리적인 소비문화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거든요. 이런 생각들을 대안농업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분명히 좋은 변화라고 느끼게 해준 기회가 있었습니다.
2015년 가을, 갑작스러운 기후변화에 수확기를 예상보다 빨리 맞이한 사과가 있었습니다. 일손이 턱없이 부족했고 자칫하면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칠뻔한 상황에 놓였는데 평소 이런 상황을 상상하긴 했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라 농장에서 운영하던 리틀파머프로젝트(사과나무 분양사업) 참가 가족에게 문자로 SOS를 청했습니다. “여러분! 농장에 미니사과가 생각보다 빨리 익었어요. 급하게 수확을 해야 하는데 많은 손이 필요해요. 도와주세요!”라고.
급하게 기획된 다음날 일손 돕기에 참가해준 가족들은 생각보다 많았고, 하루 만에 필요한 수확량을 모두 채울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농장에서 준비한 약간의 음식과 각자 가져온 먹거리들로 작은 디너파티를 하기도 했습니다. 직접 수확한 농산물을 그날 포장까지 해 선물로 드렸죠. 애타는 농부의 마음에 응해주신 가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뻤습니다.
그 해 수확한 미니사과는 소비자들에게 역대 최고의 찬사를 받게 되었고 ‘서로의 필요(농부에겐 일손이, 소비자에겐 자연과 교감하는 시간이)가 이런 방식으로도 충족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소비자가 농사일을 도와준다는 것, 농부가 남에게 농산물을 맡긴다는 건 생각보다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주었던 소비자들에게 너무나 고마웠고, 의외의 경험에서 농사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마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 같네요.
<소비자와 가까워 지기위해 농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전하고 있다.>
농부라서 누릴 수 있는 행복들
제가 농부로 살아가며 느끼는 가장 큰 기쁨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배우에게 물었습니다. “14세의 당신과 만난다면,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배우가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라. 다 할 수 있다”.
저 또한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품 안에 지니고 있었더니, 비록 깊이는 얕을지 모르지만 하고 싶었던 일들을 아름아름 다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작물을 돌보고 가꾸고, 이런 멋진 과정들을 소비자들과 나누기 위해 사진과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합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고 배포해서 소비자들과 소통하기도 합니다. 다른 분야의 제품을 벤치마킹 해 우리 농장만의 포장과 전단을 만들고, 제품이 되어 실물로 나왔을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뿌듯함도 느낍니다.
또 다른 기쁨은 도시근로자보다 시간을 비교적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유로운 전원생활까지는 아니지만 일과 휴식을 유연하게 배분할 수 있는 점이 좋아요. 본업을 잠시 내려놓고 몇 주간 다른 나라로 배낭여행을 가거나,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일에 완전히 몰두하는 일도 가능하죠. 이건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멋진 기회라 생각해요.
농업을 고민하는 친구들에게(feat.동현)
몇 년 전, 제 블로그에 이제 막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고 글을 남겼던 낯선 청년이 생각나네요. 그 친구가 어느새 전라남도 제일의 청년 농부가 되어 이제는 농사짓는 시간보다 강연에 불려 다니는 시간이 더 많다고 하는 것 같아요. 제주도에 감귤농장을 두고 있는 서울에 젊은 사장님이 계세요. 감귤로 만든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시고 클래스를 열어 강좌를 운영하기도 하세요. 화천에 한 농부는 남편분이 가수에요. 자칭 개미와 베짱이라며 열심히 즐거운 농촌 생활을 하고 계신 분도 있어요. 조금만 가까이 보면, 농촌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 한 다양한 모습들이 있어요.
전문지식을 갖추고 농부에게 가르침을 줄 수도 있고, 농부로써 누군가를 가르칠 수도 있어요. 누군가 생산한 좋은 농산물을 더 가치 있게 포장할 수도 있고, 외면 받는 농산물을 효자상품으로 변신시킬 수도 있죠. 농촌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기획할 수도 있고, 농촌에 수만 가지 소재를 가지고 예술 활동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진학이나 취업, 혹은 직업을 바꾸길 희망하는 사람들의 수많은 선택지 중에 농업과 농촌이 없다면 한 번 끼워 넣어 보세요. 흐릿하고 막연했던 미래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수많은 가능성들로 인해 뚜렷해질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사과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하려고 해요. 농부 본연의 일인 재배에 힘을 좀 더 쓰며 정착을 할까 합니다. 이미 농촌에 살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비록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도 수 천 번씩 도시로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청년이 살기에도 부족하지 않은 공간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여기에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다’라는 확신이 생긴 후부터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완전히 없어진 것 같아요. 또 언젠가 도시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크게 걱정은 안 되네요. 이렇게나 매력적인 농업과 농촌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저에게 ‘여긴 꽤 괜찮은 곳이야’라고 이야기해줄 것 같아서요.
파란농원에 놀러오세요:)
김동현 블로그 : http://blog.naver.com/pafa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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