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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크탱크 '혁신'

    박진도의 부탄 이야기 3
    • 작성일2015/10/19 11:55
    • 조회 552
    박진도의 부탄 이야기 3

    *한겨레 21 제1082호에 연재된 박진도 이사장님의 글입니다. 

    ‘소득문턱’보다 ‘행복문턱’
    1972년 ‘국민행복’ 국정지표 삼자 1인당 국민소득·기대수명 ‘껑충’ 뛰어…
    ‘최소 행복 기준’ 높게 설정해 행복하지 않은 60% 국민 행복하게 하는 게 목표


    일제강점기 비련의 신여성 윤심덕은 <사의 찬미>에서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름”이라 노래했다. 지독한 역설이다. 행복은 정녕 신기루에 불과한 것인가. 산업혁명 이후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행복을 찾고자 했다.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국내총생산(GDP)으로 ‘발전’ 또는 ‘진보’를 측정했다. 그러나 GDP 혹은 1인당 국민소득의 증대가 반드시 사람들의 행복이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이스털린 역설’이다.



    국가의 부와 개인의 행복은 함께 가지 않아

    이스털린은 1974년 저서에서 “한 사회 내에서는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보다는 행복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가 가난한 나라보다 더 행복하지는 않다. 그리고 한 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해서 그들이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스털린 역설 이후 GDP를 대신해 행복이나 삶의 질을 반영할 수 있는 지표가 많이 개발됐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개발지수(HDI)는 1인당 GDP 이외에 평균수명, 교육수준 등 세 가지 차원에서 삶의 질을 평가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개발’을 목적으로 사회 발전을 측정하기 위해 ‘웰빙 지수’(How’s Life Index)를 개발했다.
    놀라운 사실은 선진국의 유수한 경제학자들의 논의 이전에 최빈국 부탄이 이미 1972년부터 GDP가 아니라 국민총행복(GNH·Gross National Happiness)을 국정지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탄의 4대 왕 지그메 싱기에 왕추크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자신의 국정철학을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다.
    그는 “모든 나라 정부와 국민들이 경제적 부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을 성취한 사람들은 안락한 생활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나라의 부가 늘어나도 빈곤하고 비참한 삶을 살고 심지어 사회적 소외를 당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부를 증대하기 위해 환경을 파괴한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열망한다. 따라서 한 나라의 발전 정도는 사람들의 행복에 의해 측정되어야 한다”며 GDP 대신 GNH를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1960년대 부탄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1500년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동차 도로는 전혀 없었고, 경제는 생계 농업과 물물교환에 의존했다. 평균수명은 38살에 지나지 않았고, 1인당 소득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51달러였다. 의사는 단 2명밖에 없었고, 학교는 11개가 있었다.
    그러나 GNH를 국가발전 전략으로 채택한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전혀 다른 나라로 변모했다. 부탄은 1990년대 연평균 7.8% 그리고 2005~2010년에는 연평균 8.7% 성장해,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51달러에서 2014년 2730달러(구매력평가 기준으로는 7560달러)로 증대됐다. 유치원부터 10학년까지 교육이 무료다. 초등학교 입학률은 2014년 현재 98.5%이고, 8학년까지는 87% 그리고 10학년까지는 80%가 학교를 다닌다. 의료서비스 또한 무료이고, 사람들의 기대수명은 38살에서 69살로 늘어났다.



    1인당 소득 51달러→2730달러

    그렇다면 GNH란 무엇이며 그것은 정책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가.
    우선 행복에 대한 부탄의 인식이 서구 사회와 매우 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구에서 행복은 사적이며 주관적인 것으로, 즐거움 혹은 만족의 성취도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부탄 정부는 행복을 주관적 웰빙만이 아니라 다차원적(multidimensional)으로 인식한다. 또한 행복은 개개인이 느끼지만 집단적(collective)인 것으로 이해한다. GNH에 개념화된 행복은 원자화된 개인들 사이에 추구되는 경쟁적 선(good)이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행복은 깊이 연관되어 있다.
    부탄의 GNH는 1972년 4대 왕의 즉위와 함께 국정비전으로 제시되고, 1986년 “국내총생산(GDP)보다는 국민총행복(GNH)이 더 중요하다”는 4대 왕의 선언과 더불어 국가발전 전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후에도 개념적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이미 1729년에 “정부가 백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면 정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선언한 부탄 법전(Legal Code)에 있다.
    부탄은 GNH를 국가정책의 주류에 편입시키기 위해 2008년 국왕 직속의 국민총행복위원회(Gross National Happiness Commission)를 설립했다. 국민총행복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GNH를 위한 전략’을 마련하고 사회·경제적 발전계획(5개년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GNH가 국가정책의 계획, 정책 결정, 집행 과정에서 주류가 되도록 한다.
    부탄 정부는 GNH를 극대화하기 위한 네 개의 기둥을 제시했다.

    첫째 기둥은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경제적 발전이다. 4대 왕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조류에 휩쓸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그리고 문화적 가치와 전통을 반드시 보전하여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인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하여 공평하면서 높은 수준의 경제성장을 달성해야 한다.”

    둘째 기둥은 생태계 보전이다. 부탄 헌법 제5조는 정부와 부탄 인민은 현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가꿀 책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환경 보전과 사회·경제적 발전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다.

    셋째 기둥은 문화 보전과 증진이다. 부탄 헌법 제4조는 “국가는 문화를 진화하는 동태적 힘으로 인식하고, 전통적 가치와 제도가 끊임없는 진화를 통해 진보적 사회에서 지속 가능하도록 강화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넷째 기둥은 좋은 거버넌스이다. 이것은 앞의 세 기둥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수준의 정부에서 투명하고 대중의 참여와 요구를 잘 수용하고 책임지는, 그리고 효율적인 거버넌스의 틀이 갖추어져야 한다.
    부탄 정부는 ‘국민행복’을 측정하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국민총행복 조사’를 실시하고 그것을 토대로 국민총행복 지수(GNH index)를 산정한다. 2006년 예비 파일럿 조사, 2008년 파일럿 조사를 거쳐 2010년 전 국민의 1%에 해당하는 표본조사를 실시했고, 최근 2014년 조사를 마쳤다.
    GNH 지수는 다음과 같이 부탄의 발전을 이끈다. 첫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 분야에 자원을 배분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둘째, 정책 및 프로젝트 심사 도구를 통해 정책을 스크린하여 GNH를 새로운 정책과 계획에서 주류(mainstream)가 되도록 한다.



    국민 행복 떠받치는 네 개의 기둥

    GNH 지수는 9개 영역으로 구성된다(그림 참조). 이 가운데서도 눈길을 끄는 것이 ‘시간 사용의 균형’이다. 부탄 정부는 사람들이 노동을 많이 하면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 있지만, 그보다는 하루를 3등분해 8시간 일하고 8시간은 자신과 가족 그리고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8시간은 건강을 위해 수면을 취할 것을 권고한다. 이런 방침에 따라 공무원을 비롯해 공공기관 종사자는 오후 5시가 되면 모두 ‘칼퇴근’을 하여 ‘저녁이 있는 삶’을 영위한다.
    2010년 국민총행복 조사는 9개 영역(domain)에 33개 지표(indicator)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각 지표에 대해 ‘충분문턱’(sufficiency threshold)을 정하고, 개개인이 각 지표에 대한 충분문턱을 충족하고 있는지를 조사한다. 다음으로 충분문턱 조사를 토대로 각 개인의 행복 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행복문턱’(happiness threshold)을 적용한다.
    부탄 정부는 50%, 66%, 77%의 3개 구분기준(cutoff)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국민을 네 부류로 나눈다. 즉 33개 지표 가운데 충분문턱 충족 비율이 50% 이하인 사람은 ‘불행’(unhappy), 50~66%인 사람은 ‘좁게 행복’(narrowly happy), 66~77%인 사람은 ‘넓게 행복’(extensively happy), 77% 이상인 사람은 ‘매우 행복’(deeply happy)으로 분류한다.
    부탄 정부는 중간에 해당하는 66%를 행복문턱으로 설정했다. 이는 꽤 높은 수준인데, 정책목표임과 동시에 이것을 중심으로 토론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2010년 국민총행복 조사에 따르면, 부탄 사람의 10.4%는 불행하고, 48.7%는 좁게 행복하고, 32.6%는 넓게 행복하며, 전체 인구의 8.3%는 매우 행복하다.
    부탄 정부는 66% 이상을 충족한 사람을 행복한 사람 그리고 그 이하인 사람을 ‘아직 행복하지 않은’(not-yet-happy) 사람으로 구분한다. 2010년 현재 부탄 사람의 약 60%는 ‘아직 행복하지 않은’ 상태인데, 이들에게 정책 초점을 맞추어 그들이 행복한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을 정책목표로 하고 있다. 부탄 정부는 GNH 지수를 전 국민에 대해 측정할 뿐 아니라 이것을 지역·성·연령·교육수준·직업별로 측정해 이들의 행복을 어떻게 증진시킬 것인가에 대해 맞춤형 정책 프로그램을 마련한다.
    한편 부탄 정부는 GNH를 증진하기 위해 정책심사도구(policy and program screening tool)를 사용한다. 이는 GNH라는 렌즈를 통해 국가정책과 프로젝트를 체계적으로 평가해, GNH를 향상시키는 정책 및 프로젝트는 선정하고, 반대로 악영향을 미치는 정책 및 프로젝트는 거부한다.
    부탄의 GNH 정책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어떤 사람은 ‘이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이다’ ‘공허하다’고 비판한다. 2013년 새로 선출된 총리는 “GNH가 공허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GNH를 가로막고 있는 네 가지 장애 요인(국가채무, 고실업, 인프라 부족, 부패)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새 총리 “GNH 공허한 슬로건이다” 비판도

    총리의 이 발언으로 한때 부탄이 GNH보다 GDP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불러왔다. 이 논란은 언론이 총리의 말을 잘못 인용한 것이라는 해명으로 종식됐으나 여전히 문제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부탄 헌법(제9조 국가정책의 원리)은 “국가는 GNH를 성공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GNH를 실천하는 것은 공무원을 비롯해 기업 지도자, 시민 등 모든 부탄 국민의 의무다.

    박진도 지역재단 이사장·충남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