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주의인가
- 작성일2010/03/01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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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주의인가
모두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가다가 20년 전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것도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시공을 통해 구현되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因果律)의 굴레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운명적인 필연인지 내가 그렇게 원했던 홍기빈 박사와의 ‘만남’이 지난 가을에 재단에서 진행했던 지역디자인학교의 강의를 통해 이뤄지게 됐다. 나는 작년 이맘때 환경사회학회지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의 서평을 실었다. 서평을 쓴 이유는 칼 폴라니의 사상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폴라니를 만날 수 없으므로) 이 책의 저자이면서 한국에서 폴라니를 가장 잘 있는 홍기빈씨와 혹시라도 이야기를 나눌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런데, 지역디자인학교를 준비, 진행하면서 강사로 초빙된 홍기빈씨와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줄이야…….
어찌됐든 이번 글에서는, 우리 재단의 지향점인 ‘순환과 공생의 지역만들기’가 칼 폴라니가 주장했던 지역적 계획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아 이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글의 일부는 지난 환경사회학회지 「ECO」제13호 2권의 내가 썼던 서평을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 떼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사탄의 맷돌(Dark satanic mills)‘은 무엇이었는가?" 에서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번뇌가 시작된다. 이에 대해 폴라니는 산업혁명을 통한 심대한 변화인 ’시장경제를 확립하는 과정‘이 사탄의 맷돌이라고 주장한다. 시장경제란 오로지 시장만이 통제하고 조정하며 방향을 지도하는 경제체제다. 여기서 인간은 화폐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위를 한다는 가정 하에 있으며, 이를 통해 재화의 공급량은 그 가격에 대응하는 수요량과 일치하는 일반균형상태(general equilibrium state)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오로지 가격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 필수적인 시스템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생산요소의 시장거래고, 두 번째는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의 정책이다.
이러한 시장이 생기게 된 이유를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생산 설비(정교new.jpg한 기계)의 높은 가격 때문에 수지를 맞추기 위해선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계에 투입되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고, 이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상품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된 상품의 판로가 적절히 확보되어야 하므로 국가의 화폐 및 신용공급을 통한 화폐의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즉, 기계 작동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시장이라 함은 생산품 뿐 만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되는 시장도 포함되며 그 가격은 각각 이윤과 임금, 지대, 이자로 불리게 된다. 임금, 지대, 이자는 각각 노동, 토지, 화폐 사용에 따른 가격인 동시에, 이것들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소득을 형성한다. 이윤은 생산된 재화를 판매하는 사람들의 소득으로 시장에서 재화의 가격과 생산비용(임금, 지대, 이자와 원자재비)의 차액이다. 폴라니는 이렇게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시장속의 상품으로 만든 것을 상품허구(Commodity fiction)로 표현하였다.
폴라니는 상품에 대한 경험적 정의에 의해 노동, 토지, 화폐가 결코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생산된다 하더라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동은 인간에게 붙여진 다른 이름일 뿐이며, 토지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단순히 국가가 인정한 구매력의 징표”인데, 상품허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운명을 자기조정 시장체제에 넘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장경제란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사회에 담겨있는 인간, 자연, 화폐가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허구는 우리가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 속에서 이 세 가지가 악마의 맷돌에 노출되어 “노동력을 구매한 자는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인간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며, “자연은 그 구성요소들로 환원되어 주거지와 경관은 더렵혀지고, 강이 오염되며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되며, “원시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 부족이나 과잉은 경제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 한 폴라니는 근래에 벌어지는 비정규직과 지구온난화 문제, 세계 경제 위기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악마의 맷돌에 갈려지는 예는 우리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폰지 사기(Ponzi scheme)와 같은 시스템이 아니면(누군가 계속 사주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아파트를 구매하는데 빌린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맞벌이를 하면서 엄마와 아기가 생이별을 하는 모습이 하나의 복합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잘 사는 가정이나 학력이 높은 부모의 자식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면, 아비투스(Habitus)를 통해 계급의식마저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구상품화를 시키는 듯하다.
폴라니는 역사적·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상품허구와 ‘모든 종류의 소득이 인간이 무언가를 판매하는 행위에서만 발생되는 이러한 시장 체제’라는 제도적 패턴이 사회에서 돌출되어 튀어나온(Disembedded)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사건이며, 그 전에는 다양한 경제 원리가 사회에 묻어(Embedded)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생산과 분배를 조정하는 다양한 경제 원리는 자급자족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작동하는 가정경제의 원리 외에 대칭성(Symmetry)과 중심성(Centricity)의 패턴으로 짜여 더 원활하게 작동하는 상호성(Reciprocity)과 재분배(Redistribution)다. 상호성의 예로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앤드 제도의 친족 조직과 쿨라교역을, 재분배의 예로 서아프리카의 베르그다마족의 사냥 배분, 북아메리카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Potlatch), 현물경제가 대규모로 조직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국, 이집트의 신왕조 왕국 등을 들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90)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결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서로 잡아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인간의 정신에 체화된 여러 도덕적 원리들과 합치하여 나타나는 자연적 질서의 원칙”이라고 폴라니는 말하고 있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라는 사회적 배경에 의해 스미스의 인문주의적 기초를 포기한다. 맬서스는 인구론과 수확체감의 법칙을 내놓았고, 이를 리카도가 다시 손질하여 인간의 다산성과 토지의 비옥성을 구성요소로 삼아 경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생산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라고 굳게 믿은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나 국가의 개입 대신 ‘지역의 구성주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정하는 지역적 계획주의’를 사회 속에 묻어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이나 국가는 사회라는 실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일 뿐이다. 시장이나 국가에 사회를 묻어버리려는 행위는 모두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폴라니는, 시장이나 재분배, 호혜성 가운데 하나를 택해 단일한 형태로 경제체제를 세우는 것 보다는 경제관계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이 원리들이 다양하게 적용되면서 서로 공존하며 연결되는 복합적인 경제 질서가 그 대안이라고 역설한다.
우리 재단의 목표인 ‘순환과 공생의 지역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지역재단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한 주요한 사업으로 교육을 통해 지역리더를 양성하여 지역 자치를 통해 주민들 스스로가 순환과 공생의 지역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외에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폴라니가 주장하는 지역적 계획주의는 그러한 대안들의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급식이나 식량체계를 시장에만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사회구성주체들이 호혜성, 재분배, 시장이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적으로 계획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이래 30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강도와 규모로 전 세계를 휩쓸어 버렸다. 그러다 결국 화폐의 허구상품화로 인한 세계경제의 심각한 폐절이 드러나고, 지금의 금융위기와 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온난화 등의 생태위기로 인해 폴라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경제의 유토피아라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이웃과 자연을 바로 보고 끌어안으려 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폴라니가 말했던 ‘거대한 전환’이 이제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년 전,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고민과 실천을 해왔다. 자립적 삶을 위한 공동체를 꿈꾸며 귀농운동본부와 흙살림, 이장 등 삶터와 일터가 하나 되는 귀농이나 공동체에 참여하였지만, 더욱더 강고해진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칼 폴라니와의 사상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과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어릴 적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아이들이 몇 가지 직업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그냥 과학자라고 대답하곤 했다(하지만 언젠가 아버지처럼 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질문으로 누구를 제일 존경하느냐에 대해선 - 이것은 누구를 닮고 싶느냐라는 말과 같을 수 있을 텐데, 아버지와 같은 그런 당연한 사람들 빼고 - 그동안 특별히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이제 칼 폴라니라고 대답한다.
폴라니는 마지막으로 악마의 맷돌로 갈려버리는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했고, 그러한 진리를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중략) ..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복합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다."
글, 지역재단 최용재 연구팀장
* 사탄의 맷돌 : 이것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밀턴(Milton) 2장에서 산업혁명으로 생겨나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며 엄청난 물질적 부를 낳는 공장(생산체제)을 비유한 것을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을 은유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였다. 그 외에 저거노트(juggernaut)라는 말도 비유적으로 사용되는데, 저거노트는 인도의 시바신에게 인신공양 할 때 희생자를 치어 죽이는 수레로 케인스(1925)의 논문 “Economic Consequences of Mr. Churchil”에서 자유방임적 자기조정시장을 표현할 때 사용했으며, 폴라니는 시장이 청산되는 과정에서 (즉 공황을 통한 생산량 조정과정에서) 그 시장에 참여한 많은 사람과 기업이 희생당하는 사태를 여기에 비유하였다.
* 아비투스 :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0) 이론의 핵심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의 객관적 구조와 아비투스(habitus)라는 내재화된 구조의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내면화된 성향의 체계로서, 인간 행동의 생산자이며 인지와 평가와 행동의 일반적 모습이다. 위의 아비투스는 ‘사회화된 주관성‘으로 행위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도록 허락해주는 ‘행동의 연결원칙‘이다. 여기서 다양한 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공간의 하위공간인 ‘장(champ)‘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된다. 장이란 기존 행위자들 간의 관계를 변형하거나 유지하려는 갈등이 일어나는 힘의 ‘상징적 투쟁‘ 공간이다.
* 포틀래치 : 북아메리카 북서부 원주민들은 마을의 주요 의식이 있을 때 손님들에게 온갖 값진 물건을 아낌없이 나눠주는데, 특히 콰키우틀족(Kwakiutl)은 손님 앞에서 물건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관대함과 풍요를 과시함으로써 그 사회에서 명예를 드높이게 된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미국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를 이 포틀래치와 연관시켜 설명했으며, 오늘날 각자 음식을 가져와 파티를 벌이는 potluck이라는 단어는 이 포틀래치에서 유래되었다.
모두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길거리를 가다가 20년 전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것도 여러 가지 원인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시공을 통해 구현되는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율(因果律)의 굴레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러한 운명적인 필연인지 내가 그렇게 원했던 홍기빈 박사와의 ‘만남’이 지난 가을에 재단에서 진행했던 지역디자인학교의 강의를 통해 이뤄지게 됐다. 나는 작년 이맘때 환경사회학회지에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라는 책의 서평을 실었다. 서평을 쓴 이유는 칼 폴라니의 사상에 흠뻑 빠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폴라니를 만날 수 없으므로) 이 책의 저자이면서 한국에서 폴라니를 가장 잘 있는 홍기빈씨와 혹시라도 이야기를 나눌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런데, 지역디자인학교를 준비, 진행하면서 강사로 초빙된 홍기빈씨와 소주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줄이야…….
어찌됐든 이번 글에서는, 우리 재단의 지향점인 ‘순환과 공생의 지역만들기’가 칼 폴라니가 주장했던 지역적 계획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아 이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글의 일부는 지난 환경사회학회지 「ECO」제13호 2권의 내가 썼던 서평을 발췌,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인간들을 통째로 갈아서 무차별 떼거리로 만들어버린 그 ‘사탄의 맷돌(Dark satanic mills)‘은 무엇이었는가?" 에서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의 번뇌가 시작된다. 이에 대해 폴라니는 산업혁명을 통한 심대한 변화인 ’시장경제를 확립하는 과정‘이 사탄의 맷돌이라고 주장한다. 시장경제란 오로지 시장만이 통제하고 조정하며 방향을 지도하는 경제체제다. 여기서 인간은 화폐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위를 한다는 가정 하에 있으며, 이를 통해 재화의 공급량은 그 가격에 대응하는 수요량과 일치하는 일반균형상태(general equilibrium state)를 유지하게 된다. 여기서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질서는 오로지 가격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자기조정 메커니즘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를 위해 두 가지 필수적인 시스템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생산요소의 시장거래고, 두 번째는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의 정책이다.
이러한 시장이 생기게 된 이유를 폴라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생산 설비(정교new.jpg한 기계)의 높은 가격 때문에 수지를 맞추기 위해선 대량생산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를 위해 기계에 투입되는 원자재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아야 하고, 이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상품화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산된 상품의 판로가 적절히 확보되어야 하므로 국가의 화폐 및 신용공급을 통한 화폐의 상품화가 이루어졌다. 즉, 기계 작동과 관련된 모든 요소들이 시장에서 판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시장이라 함은 생산품 뿐 만 아니라 노동, 토지, 화폐가 판매되는 시장도 포함되며 그 가격은 각각 이윤과 임금, 지대, 이자로 불리게 된다. 임금, 지대, 이자는 각각 노동, 토지, 화폐 사용에 따른 가격인 동시에, 이것들을 제공하는 사람들의 소득을 형성한다. 이윤은 생산된 재화를 판매하는 사람들의 소득으로 시장에서 재화의 가격과 생산비용(임금, 지대, 이자와 원자재비)의 차액이다. 폴라니는 이렇게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시장속의 상품으로 만든 것을 상품허구(Commodity fiction)로 표현하였다.
폴라니는 상품에 대한 경험적 정의에 의해 노동, 토지, 화폐가 결코 생산되는 것이 아니며, 또 생산된다 하더라도 판매를 위해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노동은 인간에게 붙여진 다른 이름일 뿐이며, 토지 역시 자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며, 화폐는 단순히 국가가 인정한 구매력의 징표”인데, 상품허구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운명을 자기조정 시장체제에 넘겨버린 것이다. 이러한 시장경제란 아예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로, 사회에 담겨있는 인간, 자연, 화폐가 상품에 불과하다는 상품허구는 우리가 현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 속에서 이 세 가지가 악마의 맷돌에 노출되어 “노동력을 구매한 자는 노동력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인간이라는 육체적, 심리적, 도덕적 실체마저 소유자가 마음대로 처리”하게 되며, “자연은 그 구성요소들로 환원되어 주거지와 경관은 더렵혀지고, 강이 오염되며 식량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능력도 파괴”되며, “원시사회가 홍수나 가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것처럼 화폐 부족이나 과잉은 경제에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것”이라고 이야기 한 폴라니는 근래에 벌어지는 비정규직과 지구온난화 문제, 세계 경제 위기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다.
악마의 맷돌에 갈려지는 예는 우리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폰지 사기(Ponzi scheme)와 같은 시스템이 아니면(누군가 계속 사주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는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아파트를 구매하는데 빌린 돈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맞벌이를 하면서 엄마와 아기가 생이별을 하는 모습이 하나의 복합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잘 사는 가정이나 학력이 높은 부모의 자식들의 명문대 진학률이 점점 높아진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면, 아비투스(Habitus)를 통해 계급의식마저 사회적 재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허구상품화를 시키는 듯하다.
폴라니는 역사적·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상품허구와 ‘모든 종류의 소득이 인간이 무언가를 판매하는 행위에서만 발생되는 이러한 시장 체제’라는 제도적 패턴이 사회에서 돌출되어 튀어나온(Disembedded) 것은 산업혁명 이후의 사건이며, 그 전에는 다양한 경제 원리가 사회에 묻어(Embedded)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생산과 분배를 조정하는 다양한 경제 원리는 자급자족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작동하는 가정경제의 원리 외에 대칭성(Symmetry)과 중심성(Centricity)의 패턴으로 짜여 더 원활하게 작동하는 상호성(Reciprocity)과 재분배(Redistribution)다. 상호성의 예로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앤드 제도의 친족 조직과 쿨라교역을, 재분배의 예로 서아프리카의 베르그다마족의 사냥 배분, 북아메리카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Potlatch), 현물경제가 대규모로 조직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국, 이집트의 신왕조 왕국 등을 들고 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예찬하는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90)의 ‘보이지 않는 손‘은 “결코 서로의 이익을 위해 서로 잡아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인간의 정신에 체화된 여러 도덕적 원리들과 합치하여 나타나는 자연적 질서의 원칙”이라고 폴라니는 말하고 있다. 이후 경제학자들은 중상주의라는 사회적 배경에 의해 스미스의 인문주의적 기초를 포기한다. 맬서스는 인구론과 수확체감의 법칙을 내놓았고, 이를 리카도가 다시 손질하여 인간의 다산성과 토지의 비옥성을 구성요소로 삼아 경제를 설명하려 하였다.
생산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라고 굳게 믿은 폴라니는 시장자본주의나 국가의 개입 대신 ‘지역의 구성주체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생산과 분배를 조정하는 지역적 계획주의’를 사회 속에 묻어 들어가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이나 국가는 사회라는 실체가 필요로 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일 뿐이다. 시장이나 국가에 사회를 묻어버리려는 행위는 모두 인간의 자유와 이상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비극만 낳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폴라니는, 시장이나 재분배, 호혜성 가운데 하나를 택해 단일한 형태로 경제체제를 세우는 것 보다는 경제관계가 작동하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이 원리들이 다양하게 적용되면서 서로 공존하며 연결되는 복합적인 경제 질서가 그 대안이라고 역설한다.
우리 재단의 목표인 ‘순환과 공생의 지역만들기’를 실현하기 위해 지역재단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한 주요한 사업으로 교육을 통해 지역리더를 양성하여 지역 자치를 통해 주민들 스스로가 순환과 공생의 지역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 외에 많은 연구를 통해 다양한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폴라니가 주장하는 지역적 계획주의는 그러한 대안들의 이론적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학교급식이나 식량체계를 시장에만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사회구성주체들이 호혜성, 재분배, 시장이라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적으로 계획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1980년대 이래 30년 동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강도와 규모로 전 세계를 휩쓸어 버렸다. 그러다 결국 화폐의 허구상품화로 인한 세계경제의 심각한 폐절이 드러나고, 지금의 금융위기와 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온난화 등의 생태위기로 인해 폴라니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장경제의 유토피아라는 매트릭스에서 깨어나 이웃과 자연을 바로 보고 끌어안으려 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은 폴라니가 말했던 ‘거대한 전환’이 이제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년 전, 대학 입학 후 지금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고민과 실천을 해왔다. 자립적 삶을 위한 공동체를 꿈꾸며 귀농운동본부와 흙살림, 이장 등 삶터와 일터가 하나 되는 귀농이나 공동체에 참여하였지만, 더욱더 강고해진 악마의 맷돌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칼 폴라니와의 사상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과 설렘으로 다가왔다. 나 또한 ‘어릴 적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부분 아이들이 몇 가지 직업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그냥 과학자라고 대답하곤 했다(하지만 언젠가 아버지처럼 목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아무도 물어봐주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질문으로 누구를 제일 존경하느냐에 대해선 - 이것은 누구를 닮고 싶느냐라는 말과 같을 수 있을 텐데, 아버지와 같은 그런 당연한 사람들 빼고 - 그동안 특별히 존경하는 사람이 없었던 나는 이제 칼 폴라니라고 대답한다.
폴라니는 마지막으로 악마의 맷돌로 갈려버리는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은 희망을 말하고 있다. "체념은 항상 인간에게 힘과 새로운 희망의 샘이었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삼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쌓아올리는 법을 배웠다. 인간은 언젠가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했고, 그러한 진리를 자유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중략) .. 이제 인간은 사회 실재의 현실 앞에서 스스로 체념하게 되었지만, 이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다시 새로운 생명이 솟구치게 된다. 인간은 자신의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복합사회에서의 자유의 의미다."
글, 지역재단 최용재 연구팀장
* 사탄의 맷돌 : 이것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밀턴(Milton) 2장에서 산업혁명으로 생겨나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며 엄청난 물질적 부를 낳는 공장(생산체제)을 비유한 것을 폴라니는 악마의 맷돌을 은유적 표현으로 자주 사용하였다. 그 외에 저거노트(juggernaut)라는 말도 비유적으로 사용되는데, 저거노트는 인도의 시바신에게 인신공양 할 때 희생자를 치어 죽이는 수레로 케인스(1925)의 논문 “Economic Consequences of Mr. Churchil”에서 자유방임적 자기조정시장을 표현할 때 사용했으며, 폴라니는 시장이 청산되는 과정에서 (즉 공황을 통한 생산량 조정과정에서) 그 시장에 참여한 많은 사람과 기업이 희생당하는 사태를 여기에 비유하였다.
* 아비투스 : 프랑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0) 이론의 핵심이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의 객관적 구조와 아비투스(habitus)라는 내재화된 구조의 변증법적 매개를 통해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아비투스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특정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내면화된 성향의 체계로서, 인간 행동의 생산자이며 인지와 평가와 행동의 일반적 모습이다. 위의 아비투스는 ‘사회화된 주관성‘으로 행위자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도록 허락해주는 ‘행동의 연결원칙‘이다. 여기서 다양한 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공간의 하위공간인 ‘장(champ)‘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해석된다. 장이란 기존 행위자들 간의 관계를 변형하거나 유지하려는 갈등이 일어나는 힘의 ‘상징적 투쟁‘ 공간이다.
* 포틀래치 : 북아메리카 북서부 원주민들은 마을의 주요 의식이 있을 때 손님들에게 온갖 값진 물건을 아낌없이 나눠주는데, 특히 콰키우틀족(Kwakiutl)은 손님 앞에서 물건을 파괴하기까지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의 관대함과 풍요를 과시함으로써 그 사회에서 명예를 드높이게 된다. 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은 미국 부유층의 과시적 소비를 이 포틀래치와 연관시켜 설명했으며, 오늘날 각자 음식을 가져와 파티를 벌이는 potluck이라는 단어는 이 포틀래치에서 유래되었다.